칼럼읽다

인생 꽃이 피고 진 뒤에야, 마음속 꽃이 보이더라

닭털주 2022. 5. 13. 11:19

인생 꽃이 피고 진 뒤에야, 마음속 꽃이 보이더라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의 어떤 날] 양희은 | 가수

 

무성한 여름을 향해 봄이 달리고 있다.

세상 가득 채우며 깨어나는 생명의 푸릇함을 보라고 봄이라 이름하였을까?

안 보이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해서 봄이 되었나?

숲에는 함께 필 수 없는 꽃들이 만발하니 살짝 섬찟해서 벚꽃과 진달래를 함께 본다.

분명 이게 순리는 아닌데? 어린잎들이 죄다 아우성을 쳐대는 휴일 아침 벚나무 잎들이 분홍이 섞인 연둣빛 잎을 키워내고 있었다.

꽃이 진 자리에 밀고 들어와 잎으로 채우는 교대근무일까?

 

라디오 진행자들은 꽃이 필 즈음이면 꽃구경 얘기를 잘도 전하지만 막상 길 떠나서 유명하다는 곳으로 꽃구경 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하지만 쉬는 날까지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다니는 건 쉬는 게 아니라서다. 사람들과 눈이 맞으면 웃고 또 사진을 함께 찍기도 하니까 혼자 말없이 마냥 걷고 싶거나 멍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어렸을 때는 내가 모르는 이가 친근하게 다가오면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는데 왜 나를 아는 척할까? 하고.

휴일 아침 수영장에서 70년대 초에 내가 진행했던 <우리들>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다면서 목소리를 들으니까 나는 너무 잘 아는 분 같은데 사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이잖아요? 그런데 목소리를 들으니 꼭 꿈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반갑습니다. 어머! 믿어지지 않네요

하는 인사를 들었다.

이른 아침 수영장 바닥에 물그림자가 어리며 빛이 만드는 굴절이 마음을 환하게 만들었다.

 

사실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일찍 눈이 떠지니 좀 억울했다.

한시간 정도 늘어지게 더 자고 싶은데 아침을 차리고 빨래를 돌리고 점심거리를 챙긴다.

도대체 왜 새벽에 문 여는 가게는 없는 걸까?

아침에 놀 거리와 함께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새벽 6시에 여는 카페, 식료품 가게는 찾을 수 없으니,

이른 아침 카페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와 커피를 즐긴다거나 새벽에 장보기, 영화 구경이 아쉽다.

벚꽃이 지기 전에 꽃길 걸어보자고 친구들과 만나서 맛나게 밥 먹고 얘기만 나누다가 헤어졌다. 비 오면 꽃이 질 거라며 서둘러 여럿이 남산길 걸은 친구, 입은 옷이 더 꽃밭인 듯 꽃무늬 가득한 재킷 걸치고 올림픽공원에 찾아가 벤치에 한참 앉아 있었다는 친구 얘기에 멍때리기도 필요하다며 잘했다고 다들 격려해주었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나는 친구들은 다 병원 뒷바라지로 지쳐간다.

그러니 가끔 자신을 위한 동굴이 필요하다.

열린 공간이나 동네 카페라도 혼자 나와 쉴 수 있음 그곳이 각자의 동굴이 되겠다.

독일 친구가 동굴 찾아 서울로 나온다면서 뭐 부탁할 것 없냐길래 두가지 약을 부탁했다.

혈액순환개선제와 두피영양제!!

뭐 더 없냐고 자꾸 묻는데 이제 내게 필요하고 절실한 건 약뿐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둘이 낄낄댔다.

우리가 지금 무슨 좋은 옷, 신발, 핸드백이 필요하겠냐?

겉에 걸칠 것보다야 내실을 기하자, 건강하자, 잘 버티자로 얘길 마쳤다.

오늘 동네 한 바퀴 걷는데 우리 동네는 언덕 같은 산(정발산 해발 87.7m)임에도 산그늘 지는 곳은 꽃도 더뎌서 철쭉, 싸리꽃, 복숭아꽃, 앵두꽃 그리고 라일락까지 집집이 담장 너머 고개 내밀고 미모를 자랑한다.

꽃 이야기가 이리도 긴 걸 보니 한 시절이 지났다는 얘기구먼.

새파란 젊은이가 꽃꽃꽃 하는 건 못 봤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꽃 이야긴 흔하다.

인생의 꽃이 다 피고 진 뒤에 비로소 마음속에 꽃이 들어와 피어 있다는 거니까.

노래도 마찬가지다.

노래가 무언지 알 때쯤 노래는 나를 떠난다.

일할 기회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씁쓸하게 웃는다.

노래할 일이, 기회가 점점 사라진다. 흑흑.

대신 어쩌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마냥 고맙고 두렵기도 하다.

날이면 날마다 무대에 서서 노래할 때는 어디서나 쉽게 노래가 나왔다.

드문드문 일이 있을 땐 가사를 잊을까 봐 (남의 노래인 경우) 며칠을 중얼거리다 꿈에서도 그 곡을 익히고 있다.

한밤중에 깨어 노랫말을 읊조리는 나!

늘 기본인 무대공포는 더더욱 심해져서 이 사람이 52년짜리 가수 맞나 싶다.

가슴이 울렁거리면 노래 시작부터 흔들리며 호흡이 평온하지 않다.

내 동생 희경인 무대에서 한번도 떨린 적이 없다는데 나는 모지리인가?

시작해서 한 40여분간은 그놈의 공포와 싸우다가 서서히 풀어진다.

94년 첫 공연 이후 경력이 쌓이면서 그나마 나아진 게 지금은 5분 정도면 공포가 정리된다. 하지만 내 콘서트가 아닌 한두어곡의 무대인 경우 떨다가 마는 무대는 어쩌랴?

나는 기가 막혀서 웃는데, 보고 듣는 이들은 여유만만으로 안다.

그러니 실은 엄청 떨린다고 밝힐 수도 없고.

4월 끝자락부터 바로 그런 한두곡짜리 무대가 자주 있을 거라고.

오랜만이구먼하고 봐주십사고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