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말글살이] 말의 적

닭털주 2023. 7. 14. 10:54

[말글살이] 말의 적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연필이 한 자루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소금이 한 톨 있다

사람이 한 명 있다라는 문장들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렇다. ‘1’.

수는 추상화의 끝판왕이다.

숫자가 없다면, ‘연필=강아지=소금=사람이라는 등식을 상상할 수 없다.

수는 이질적인 것들 속에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공통점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로 만든다.

우리는 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수량화에 가장 적합한 체제다.

인간을 비인격적 숫자로 등치시키고 대체 가능성을 점점 확대해 왔다.

인력수급만 잘 되면 그만. 누구든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성과지표는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니, 수량화야말로 사회의 핵심 작동방식이다.

이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수량화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공기 속에 숫자가 섞여 떠다니고, 어떤 숫자는 나를 옥죄고 있다.

수량화는 개인의 우여곡절과 사연을 몰수한다. 모든 정황을 균질화한다.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비틀어 말하면, 수량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말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말의 힘은 지금 당장 눈앞에 없는 것, 논증할 수 없는 것,

숫자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발휘된다.

사랑, 우정, 아름다움, 희망, 하나님, 새 세상같은 말은 속이 비어 있는 과자 같지만,

우리에게 각기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측 불가능한 삶의 질곡을 담는 데 말의 유연성(불확실성)’만큼 적당한 그릇이 없다.

숫자는 말의 적이다.

말의 성에 살면서 숫자의 공격에 뻗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