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사회,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입력 : 2023.12.15. 20:17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한국사회가 중독으로 병들고 있다.
알코올·도박·마약·인터넷의 4대 중독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근 청소년과 직장인으로 확산되는 마약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에서 보는 좀비 같은 현상을 목격할 날이 머지않았다.
강수돌과 홀거 하이데는 공저 <중독의 시대>에서 그 원인을 근대의 탈자연화와 인간해방에서 찾는다.
자연과의 분리를 통해 외부에 존재하는 신으로부터 인위적인 해방을 이룬 인간은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공동체의 분열과 경쟁이 강화되고, 심층적 분열은 내면의 두려움을 초래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에 기대는 것이 곧 중독이라는 질병이라고 한다.
작년 정신진료환자는 400여만명에 이른다.
고도의 압축성장과 급변하는 사회변동,
경직된 사회질서 체제,
전쟁의 참상과 군부독재에 의한 내·외상의 트라우마,
상시적인 전쟁 위협이 한국을 거대한 정신병동으로 만들었다.
또한 백성들은 거대하고 강력한 자본의 지배하에 놓였고, 공사 구분 안 되는 난장판의 정치와 운영철학과 구심점도 없는 검찰국가의 퇴행으로 심리적 아노미를 겪고 있다.
취업과 주거 난에 휩싸인 젊은 세대는 지속사회를 위한 관례인 결혼마저 포기하며 무의미로 점철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 <성(城)>에서 주인공이 성주를 만나고자 해도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된 삶은 지속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벌인 일이다.
자본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의 창안물이다.
자연을 객관화시킨 과학도, 과도한 이성의 합리화도, 심신의 균형인 항상성을 깬 것도 우리 인간이다. 자본의 전략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기계로 전락한 것도 우리 자신이다.
물질의 노예로 추락한 인간은 공허하다.
그 자리를 끊임없이 대체물로 채운다.
유형무형의 사물에 중독되면 될수록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악순환 끝에 마침내 파멸로 떨어진다.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다가 자기혐오·자기파괴를 거쳐 무(無)로 귀결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비본래적인 자기에서 파생된 존재의 불안이 자신을 쓰나미처럼 덮쳐 익사시킨다.
그렇다면 탈출구는 있는가.
돌부리에 넘어진 자, 돌부리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불법의 가르침에서 볼 때,
그 원인은 자아에 집착하는 아집(我執)과 세계의 존재나 구조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이다.
전자는 자아를 상주하는 유일한 존재이자 세상의 주관자·지배자라고 오판하는 것이다.
후자는 모든 존재가 불변하다고 믿고, 그 세계구조에 순응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걸 걷어내면 끝없이 변화하는 관계의 세계만이 남는다.
분리란 없다.
오직 하나의 마음인 일심이 있을 뿐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을 포용하는 일심이 우리 삶의 핵심이다. 진여는 불생불멸한 우리 마음의 본체다. 생멸은 현상세계를 생성하는 망념의 작용이다. 일체유심조는 이를 말한다.
일심의 내용을 달리 말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진공은 차별 없는 세계다.
우리 안에 주체란 없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 무아인 동시에 대아다.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보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된다.
분별없는 차원에서 너와 나는 둘일 수 없다. 마음과 경계, 본질과 현상은 둘이 아니다. 진공은 집착 없는 마음이다. 어떤 존재도 결코 소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청정한 의식이 세상을 향하게 되면,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절대성을 구가하고 있음을 본다.
묘유의 세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순간순간 빛나는 신의 모습이다.
비교 대상도 될 수 없고, 동일성에 포섭될 수도 없는 완전한 부처로 우뚝 서 있다.
존재의 신비가 묘유다.
집단병동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존재만으로도 삶의 기쁨은 충만하다.
나와 자연은 주객미분(主客未分)으로 하나가 된다. 하나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
바다를 향해 함께 장강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나’라는 의식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잠깐 동안의 물방울이다.
도도한 우주의 흐름 속에 고립은 없다. 대해에 합류한 존재 자체가 도파민이다.
존재는 마음의 부산물인 자본도 국가도 파괴 불가능한 성역이다.
세밑엔 무언가에 중독된 자신을 성찰하며, 새해엔 빛나는 존재의 태양을 맞이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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