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 ‘서울의 봄’
입력 : 2023.12.03. 20:30 조광희 변호사
입을 모아 한국 영화의 침체를 걱정하는 시절이다.
아니,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이미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영화 투자는 개점휴업 상태다.
제법 잘 만들었다는 작품들도 개봉하자마자 씁쓸하게 퇴장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 와중에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했다.
여느 영화들처럼 이미 제작했으니 개봉을 안 할 수는 없고, 의례적인 과정을 거쳐 사라지려니 했다. 그런데 호평이 계속 들려오자 극장에 안 갈 수 없었다. 관객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이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의미도 잡고 재미도 잡은 보기 드문 수작이다.
1979년에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을 정면으로 다룬 이 영화는 리얼하다.
마치 내가 반란군 또는 진압군의 일원이 되어 현장을 뛰어다니는 것 같다.
대규모 병력이 충돌하는 전쟁이 아니니만큼 스펙터클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력 찬탈과 그에 맞서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어떤 의미에서 더욱 스펙터클하다.
쿠데타 과정에서 눈여겨볼 자원과 거점들을 살펴보자.
무력으로는 서울에 위치한 소규모 병력과 서울 바깥에 주둔하다가 서울로 들어오는 조금 큰 병력이 있다.
대통령, 계엄사령관, 국방부 장관,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이
지키거나 무장해제되어야 할 인적 거점이고,
그들이 위치하는 지휘의 공간 또는 타격의 공간은 청와대, 보안사, 육군본부, 특전사, 수도경비사령부 등이다.
한강 다리들이 무력이 흘러가는 공간의 관문이며, 유선전화가 각 무력을 동원하거나 주저앉히기 위해 사용되는 정보 통로다.
반란군은 통신망 감청과 사적 조직을 통하여 미리 관문과 통로를 확보한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군은 지휘계통을 뒤흔들고, 진압군의 무력화를 시도한다.
서로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반란군이 마침내 진압군 수뇌부를 제압하고 육군본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지휘 장소를 장악하며 무기력한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얻는다.
그 과정을 보는 것은 괴로운 동시에 즐겁다.
괴로운 것은 선이 악에게, 법이 불법에게 패배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기 때문이고,
즐거운 것은 권력의 이동이 벌어지는 미시적 과정을 관찰자로서 바라보는 쾌감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스포일러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아는 사람도 얼마든지 박진감 넘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
관객들은 인적 거점과 장소적 거점, 무력의 진퇴, 통신의 연결과 단절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어떻게 상황을 요동치게 하는지를, 외로운 단독자인 개별 인물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숨죽이고 바라보게 된다.
몰입감을 위하여 감독은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버무린다.
실제 사건에 극도로 기반하면서도 몇가지 허구를 그려 넣었는데, 그런 허구조차 없었다면 영화는 지나치게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만일 허구가 지나쳤다면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각본과 연출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물의 각색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인물에 기초하면서도 적절한 변주가 가미된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매체를 통해 전해 들은 정도밖에 모르지만, 선악과 개인적 캐릭터를 가감하면서 간을 잘 맞추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아마 실제 전두환은 영화 속 황정민보다 유머는 부족했을 것이고,
어딘가 모르게 망나니 같은 느낌보다는 정상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실제 장태완은 영화 속 정우성보다 멋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매체의 놀라운 점은, 가공된 성격이 실제 인물보다 그 인간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과 주연배우들은 선악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다 거기에서 거기’라며 함부로 반란군의 비열함과 부도덕성에 면죄부를 주지 않음으로써 미묘한 줄타기를 성취한다.
제작진, 특히 감독의 역사관과 인간론이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영화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비극으로 끝나는 윤리적 행동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칠레의 피노체트처럼 한세상 편안히 잘 살다 떠난 전두환이 보여주듯이,
인과응보가 작동하지 않는 속세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곳은 인간의 땅인가 짐승의 벌판인가.
곧 영화 <나폴레옹>이 개봉한다.
<서울의 봄>을 본 마당이라 리들리 스콧은 이 이례적인 인물을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하다.
물론 아무 명분도 없는 신군부 반란군을 나폴레옹과 비교해보겠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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