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자라 청년이 된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지니와 신밧드는 여자애들이 자기들보다 힘도 세고 논리적으로 말도 잘하고 시끄럽고 극성맞다고 관자놀이에 힘줄을 세우며 의견을 피력했다. 이토록 격렬한 합평 시간은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여자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내 만나고 졸업하고 회사에 가도 만나고 결혼해도 만나니 잘 지내보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마무리를 했다.
수정 2025-04-02 17:35등록 2025-04-01 16:52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어쩌다 소년글방을 하게 됐다. 글방을 시작한 이래 내가 운영하는 글방에는 늘 여자들이 많았는데 소년 4명만이 참여하는 글방을 열게 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검바는 5학년이었는데 이미 150여종의 새를 직접 본 베테랑 탐조 소년이었다. 검바로 인해 나는 새를 보는 사람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버드걸’이라는 멋진 책도 읽게 되었다. 양몽도 검바와 같은 열두살이었다.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처럼 생겼고 종종 함께 여행을 할 때는 헤드셋을 쓰고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을 시전하곤 했다. 신밧드는 4학년으로 세상 명랑하고 다정하고 놀랍게도 글 쓰는 걸 즐겼다. 지니는 2학년으로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어린이였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 오늘은 몇장 써요? 물어보고는 늘 협상을 시도했다.
글감이 어려우니 3장만 쓰고 싶다거나 4장의 첫줄까지만 써도 되냐거나 자신은 2학년이니 2장만 쓰고 싶다거나 원고지 매수를 두고 줄다리기를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주로 줌으로 만나 1시간 글을 쓰고 1시간 합평을 했다.
종종 듣도 보도 못한 합평에, 책 읽고 쓴 독후감에 대한 평으로 그 책 얼마냐고 물어본다든가 따위, 나는 종종 웃음을 참다가 사레가 들리곤 했다.
어떤 글감으로 글을 썼을 때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합평 시간에 지니가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뭐가 억울한지 묻자 선생님이 여자애들 편만 든다는 것이다. 이에 신밧드가 가세해서 억울한 이야기에 불이 붙었다. 장난치다가 실수로 여자애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선생님은 혼을 낸다, 반대로 여자애가 나를 때렸을 때는 장난으로 그런 거니 봐주라고 한다, 싸울 때도 여자애들 편만 든다, 남자들을 차별한다, 그런 내용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내 말에 지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을 했다. 간식도 여자애들 먼저 먹게 하고요, 체육 시간에도 여자애들 하고 싶은 걸 먼저 해요. 두 소년이 하도 격정적으로 주장하길래 정말 그렇다면 선생님께 이 문제를 제기하고 여자 친구들과 토론을 해보면 어때?라고 하자 지니와 신밧드가 손사래를 쳤다. 안 돼요 안 돼, 여자애들이 말을 너무 잘해요. 말로 이길 수가 없어요. 요란한 토론을 어쩐지 냉소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며, 우리도 그 시절 다 보내봤지 하는 얼굴, 한마디도 안 하는 검바와 양몽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들에 의하면 4학년 때까지는 그러한데 5학년이 되면 아예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놀 때도 따로 놀고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속으로는 관심이 많은데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자 절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지니와 신밧드는 여자애들이 자기들보다 힘도 세고 논리적으로 말도 잘하고 시끄럽고 극성맞다고 관자놀이에 힘줄을 세우며 의견을 피력했다.
이토록 격렬한 합평 시간은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여자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내 만나고 졸업하고 회사에 가도 만나고 결혼해도 만나니 잘 지내보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마무리를 했다.
수업을 마치고 한동안 억울하다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20대 청년 남성의 보수화 경향을 논할 때 첫머리에 나오는 분석이 억울함의 정서라는 글을 여러군데서 본 적이 있다.
20대 남성은 사회의 주류 담론을 20대 여성이 장악하고 이들의 투쟁과 요구로 여성 관련 정책이 진화하는 반면 청년 남성이 겪는 문제는 소외되어 사회적 공정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취업의 장이나 학교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차별받는 존재가 아닌데도 사회적 자원을 여성들에게 편파적으로 할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분노로 이어지고 여성에 대한 혐오로 번진다는 고찰은 확실히 따져물어보아야 할 것이 많은 이야기지만 20대 남성의 좌표에서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은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혐오적 발언과 행동이 제재 혹은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한 혹은 인지한 세대라는 것이다. 이전 세대의 윤리와 도덕을 무비판적으로 이어받아 살다가는 자칫 범죄자가 되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 첫 청년 세대인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삶의 질서 전반을 관통하는 행동규범이다.
사랑의 언어, 연애의 기술, 이별의 방식이 창의적으로 재조직되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사실 내 주변의 청년 남성들은 이미 감지하고 있다. 성별 임금 격차, 정부 각료의 남녀 성비, 기업에서 고위직의 남녀 비율까지 전 사회를 관통하는 새로운 도와 덕이 필요함도 인정한다. 육아휴직도 적극적으로, 돌봄과 가사노동은 공공의 영역에서 재편해 해결하자는 주장에도 청년 남성들은 동의한다.
다만 대전환의 시대에는 혼돈과 시행착오와 딜레마가 혼종하는 법.
백래시의 열풍이 부는 듯하지만 도도한 시대정신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청년들은 다시 빛을 향한 최전선에 설 것이다.
그것은 사피엔스의 가장 완고하고도 유구한 전통이다.
어쩌면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옛것들과 이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년 남성들과 손을 잡을 때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후진 발상이나 생각, 행동과 단호한 결별을 할 수 있도록 다정한 연대가 필요하다.
연대는 다음 세대와도 해내야 하는 주요한 책무다. 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된다. 소년들의 억울하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고 토론하고 함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억울함의 맥락을 잘 풀어헤쳐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탄력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각각의 성이 지닌 고유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새로운 관계의 틀과 내용을 만들어내는 공부를 교실에서 집에서 학원에서 훈련하고 공부해야 한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이들이 청년이 될 것이므로.
검바와 양몽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청소년으로 진입한 것이다.
지니는 4학년이 되어 원고지 4장 정도는 너끈히 써내는 사람이 되었다.
신밧드는 종횡무진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한 세계를 펼쳐내며 매주 인생작을 경신하고 있다.
나는 공들여 이들과 쓰고 말하고 읽고 여행한다. 요 소년들이 진부하고 낡은 것들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내고 총명한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고 오래된 습관 따위 유전자에서 미련 없이 삭제하며 다가올 세상의 주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년 강도가 높아지는 재난과 문명사적 위기를 함께 이겨나갈 동지들이 오늘 그 용맹하고 영리하고 사나운 여성 가운데 있음도 잊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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