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역사 품은 도서관, 한국의 오늘을 묻다 [.txt]
국권 상실 현장과 자살한 권력자 집
공화당 당사, 항쟁과 학살 장소 등
정치·역사 연결고리 도서관 조명
이문영기자
수정 2025-03-14 09:33 등록 2025-03-14 05:00
김대중 대통령이 ‘사직동팀’ 폐지 방침을 발표한 2000년 10월16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사직동팀 건물(현재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 문화관) 정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어린이들을 위해 설립(1979년)된 시립도서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른들이 오갔다. 책 읽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가면처럼 앞세운 그들은 도서관 건물 한 동을 차지한 채 무언가로 분주했다. 1983년 서울시가 도서관을 증축한다며 위장 예산을 편성해 2층 건물을 3층으로 올렸다. 건물 사용자는 아이들이나 도서관 직원이 아니라 청와대 특명을 수행하는 비밀경찰들이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한국판 미 연방수사국(FBI)’을 만든다며 창설한 특별수사대는 그해 선포된 유신헌법을 음지에서 떠받치는 조직이었다. 고위 공직자와 대통령 친인척 비리 조사를 명분으로 경찰 지휘 계통 밖에서 움직이며 야당 정치인 수사나 고문치사 등을 자행했다.
도서관 건물을 18년 동안 ‘안가’로 쓴 그들은 ‘치안본부 특수1대’ 또는 ‘경찰청 조사과’란 공식 명칭보다 ‘사직동팀’(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지시로 해체)이란 악명으로 불렸다.
책과 어린이, 비밀경찰이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의 과거에 얽혀 있다.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l 백창민 지음, 한겨레출판, 2만5000원
도서관은 책의 집이지만 책만 보관하는 장소는 아니다.
도서관은 시간과 역사를 소장한다. 책의 존재 양식 변화(종이책 독자 감소)가 도서관의 존재 양식을 흔들고(문화 시설 확충을 위해 책 폐기) 있지만 당대의 정치·사회·문화가 새긴 흔적은 티끌 하나 내려앉지 않는 전자도서관이 아니라 낡고 마모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다.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은 도서관의 도서들보다 도서관에 묻은 시간과 역사를 열람하는 책이다. 사랑하면 궁금해지고 궁금하면 질문하게 된다. 도서관들이 지우지 못한 잔재는 무엇이고, 도서관들이 지워선 안 될 현장은 무엇인가.
‘도서관 덕후’인 저자는 도서관을 접할 때면 떠올랐던 질문들을 품고 질문들에 답을 줄 도서관들을 찾아 나선다. 그 도서관들이 통과해온 시간엔 국권 상실과 일제 강점, 한국전쟁과 남북 체제경쟁, 군사독재와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져 온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이 투영돼 있다.
시민혁명 앞에서 일가족이 권총 자살한 부통령 이기붕의 집이 4·19혁명기념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은 ‘격변과 도서관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이면서 직설적인 사례다.
서울시 종로구 화동 옛 경기고등학교 교정에 조성된 정독도서관의 본관. 한겨레 자료사진
1977년 개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정독도서관(서울 종로구)은 박정희가 강남 개발을 밀어붙이며 제시한 유인책(강북 명문고들을 이전해 8학군 조성)의 파생물이었다.
강남 이전에 반발하는 경기고를 설득하기 위해 교정을 도서관화 하는 타협안이 제시됐고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정·正)을 끼워 넣은 도서관 이름(입구 상단)도 직접 썼다.
경기고가 터를 잡기 전 그 땅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었다.
김옥균의 첫 관직(성균관 도서 출납을 담당하는 ‘전적’)과 정변 실패 뒤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의 첫 직업(1888년 지금의 국립의학도서관에서 동양서적 담당)이 사서였다는 사실도 그들 집터의 미래와 운명처럼 얽힌 듯하다.
1990년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당사 후보지로도 정독도서관이 거론됐다.
서울 용산도서관은 박정희가 창당한 민주공화당 당사에서 1981년 문을 열었다.
그 건물로 이사 오기 전까지 공화당이 썼던 소공동 당사(서울 중구)는 남대문도서관(현재 남산도서관)이 남산으로 이전(1964년)하면서 비운 공간이었다. 남대문도서관의 옛 이름은 경성부립도서관(일제가 1922년 서울에 건립한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는데 도서관 개관 전 일제가 한국주차군사령부로 사용했다. 사령부 입주 전엔 대한제국 영빈관인 대관정 건물이었고, 대한제국이 매입하기 전엔 ‘고종의 밀사’ 호머 헐버트가 살던 집이었다. 헐버트는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관립중학교(경기고의 전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도서관은 물고 물렸던 한국 근현대 정치의 압축판이자 연결 고리였다.
대한제국 황실도서관이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의 옆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그 정치가 불의할 때 도서관은 민주주의 열망이 응집된 공간(1979년 부산대·동아대·경남대 도서관 앞에서 부마항쟁 시작)이 됐고, 학살의 현장 위에서 ‘잊지 않겠다’는 다짐(5·18 계엄군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자리에 무등도서관 건립)으로 솟았다.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인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장소는 대한제국 황실도서관인 덕수궁 수옥헌이었고, 고종이 이준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 장소는 수옥헌이 이름을 바꾼 중명전이었다.
정독도서관 안엔 김옥균·서재필뿐 아니라 박제순의 집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국립중앙도서관이 되고 국립중앙도서관이 북한의 인민대학습당과 경쟁해온 ‘도서관의 흥망성쇠’를 훑으며 저자가 들추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의 현재’다.
“‘오늘의 도서관’이 지닌 빛나는 모습은 과거 도서관인과 시민이 ‘어제의 도서관’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성과의 축적입니다. 반대로 도서관이 지닌 문제와 모순은 과거 우리가 외면했거나 해결하지 못한 현실이 누적된 결과입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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