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투명한 승부에 끌린다

닭털주 2025. 4. 11. 09:25

투명한 승부에 끌린다

 

수정 2025.04.10 21:35

 

김봉석 문화평론가

 

 

 

한국 최고의 바둑 기사이며 사제지간인 조훈현과 이창호의 드라마틱한 승부를 그린 영화

<승부>.

 

 

바둑은 둘 줄 모른다. 할아버지는 바둑을 즐겨 두셨고, 바둑을 두는 친구들과도 가까웠지만 딱히 배우지 않았다. 잡기를 싫어한 건 아니다. 중국과 일본 장기, 체스를 두고 화투와 포커 등도 한다. 바둑을 볼 줄은 안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바둑책을 그냥 읽었고, 신문에 나오는 기보도 매번 들여다봤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집에 있던 책과 잡지, 신문을 다 읽을 때라 그랬다. 그러다 보니 서봉수와 조훈현의 스토리를 알게 됐고 차민수, 이창호, 이세돌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지난달 26일 개봉해 12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어 순항 중인 <승부>의 내용도 알고 있었다. 한국 최고 기사였던 조훈현의 유일한 제자 이창호. ‘돌부처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승을 넘어, 세계 최고 자리에 우뚝 섰던 이창호. 조훈현은 일본에서 세고에 겐사쿠를 스승으로 모시며 바둑을 사사했다. 제자를 가려 받는다던 세고에의 유일한 한국 제자 조훈현은 고국으로 돌아와 천하를 평정했다. 그런 조훈현의 유일 제자 이창호. 드라마틱하고 완벽한 스토리다.

서봉수와 조훈현의 라이벌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조훈현과 이창호의 인연은 마음을 흔드는 무엇이 있다. <승부>는 그 무엇을 잘 그려낸 영화다.

 

1989, 조훈현은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잉창치배 1회 대회에서 녜웨이핑을 꺾고 우승했다. 한국을 변방이라 치부하던 중국과 일본 모두를 머쓱하게 만든 승리였다. <승부>는 조훈현의 잉창치배 우승에서 시작한다. 국내 다른 기사들은 거의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승률을 보인 조훈현에게 어린 이창호가 나타난다.

이창호는 스승과 다른 기풍으로 성장한다.

전신(戰神)이라 불릴 정도로 집요하고 전투적인 조훈현과 다르게 이창호는 기다리고 돌아가면서 상대를 포획한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보다 안정적인 길을 걸어가려는 신중한 태도. 이창호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스승과 마주할 실력을 얻는다.

 

역사적 사실에서 알고 있듯이, 이창호는 조훈현을 넘어섰다.

그렇다고 이창호가 조훈현보다 뛰어나거나 위대한 것은 아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최강자를 가리고 싶은 욕망이 넘실댄다.

펠레와 마라도나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축구 선수일까?

최고의 투수는 선동열과 최동원 중 누구일까?

시대가 흐르면, 실력도 업그레이드된다.

기술과 전략이 업데이트되고 첨단 과학이 덧붙여진다.

일대일로 붙는 격투기도 시대와 체급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체급을 두세 개 뛰어넘으며 챔피언을 석권하는 선수가 뛰어나지만, 정점의 일인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모호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강함을 원하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승리를 바라지만 승부의 순간에는 모호한 무엇이 작용한다.

상대에게 객관적인 우위에 있어도, 승부의 순간에는 기술과 체력 이외의 무엇이 필요하다.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말한다.

평정심을 잃지 마라.’ 흔들리고, 불안에 사로잡히면 보이지 않고, 손이 헛나간다. 기세를 놓치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애초에 승부를 겨룰 만한 상대가 아니라면 마음을 놓쳐도 이기겠지만, 호각세라면 기세와 평정심이 승부를 좌우한다.

체력과 기술,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승리한다. 언더도그가 의외의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다.

 

스포츠의 승부는 선명하다.

이기고 지는 모든 순간에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깨끗하다.

약간의 오심이나 더티 플레이가 있어도 승부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다. 허용되는 반칙과 결정적인 운도 필요하겠지만, 스포츠의 승부는 심플하다.

더욱이 바둑은 오심이 존재할 수 없는 승부다.

제자가 스승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여 승리했다고 해서 비난받지는 않는다.

패자가 많은 인기를 얻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승부는 이미 갈린 후다.

스포츠의 승부는 상쾌하다.

내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가 진다면,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인정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 뛰어난 실력이 있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한 번 성공을 발판으로 더러운 권력을 탐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맥과 연줄만으로 살아남는 이들도 있고. 정치도, 비즈니스도, 깨끗하고 선명한 승부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점점 그렇다.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과가 없고, 패배에 대한 명쾌한 승복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승부는 너무나도 더럽고, 야비하고, 폭력적이다.

그래서 <승부>를 보며 감동한다.

승부가 너무나 중요하지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투명하고 아름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