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괴물과 초원사진관의 차이 [크리틱]

닭털주 2025. 4. 13. 20:57

괴물과 초원사진관의 차이 [크리틱]

수정 2025-04-09 18:48 등록 2025-04-09 18:45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스틸컷.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영화관에서 연간 73일 이상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스크린쿼터제도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뜬금없을 정도로, 지난 30년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투자협정(BIT)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려던 정부에 맞서 영화계 전체가 투사로 변신했던 1998, 아름답고 잔잔한 영화 하나가 극장에 걸린다. ‘8월의 크리스마스. 주인공 한석규가 일하던 초원사진관은 영화 자체와 동일시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군산시 신창동을 찾은 많은 이들은 사진관 앞에서 영화 속 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하며 그 공간을 즐긴다. 그렇게 한세대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초원사진관은 영화 촬영지를 넘어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 미래의 거장이 될 봉준호 감독이 블록버스터 영화 괴물을 발표한다.

돌연변이 괴생명체가 한강에 나타나 서울 시민을 위협하고, 한 가족이 이를 상대로 혈투를 벌인다는 영화 속 이 별난 주인공을 당국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서울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캐릭터이니, 그 조형물을 한강에 설치해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발상이었다. 아마도 공룡과 고릴라를 이용한 타국의 성공 사례가 그 결정의 숨은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도시 이미지를 높이자는 희망찬 목표를 안고 한강 둔치에 거금을 들여 2014년 설치된 괴물조형물은, 결국 도시 이미지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난해 철거되었다.(표면적 이유는 공공미술 기준에 맞지 않는다였다.) 한때 서울을 홍보할 기대를 받았던 영화 주인공은 10년을 못 버티고 그렇게 우리 도시에서 쫓겨났다.

 

한류 열풍 덕에 드라마 촬영지, 영화 세트장,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이 전국 지자체에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인식되며 경쟁적으로 유치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노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히트하자 4억원을 들여 서울 삼성동에 말춤 조형물을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낸 주체는 정작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원작자가 아니었다.

유명세라는 힘을 이용해 다른 것을 하고 싶었던 정치권력이었다.

조형물처럼 권력의 편애를 받은 상징도 드물다.

조형물이 제공하는 가시성은 자신의 존재 가치 증명에 강박증을 앓는 권력에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영화의 기억이 사그라질 무렵, 그리고 그 권력도 사라지고 나면, 유명할 때는 보려 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던 조형물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초원사진관은 특별하다.

도심지 차고지를 개조한 세트 처리를 두고 군산시는 흔치 않은 결정을 내렸다.

시민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새로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이는 권력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은 드문 사례이기도 했다.

그 결과, 시민들은 초원사진관을 영화 속 장면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그곳을 사용하며 추억을 쌓았다.

그렇게 부모의 기억은 아이들에게 전해지며 세대가 지나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장소로 남았다.

미국의 한 인문지리학자는 사람들의 애착이 생길 때 비로소 공간이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공간과 장소’, -푸 투안)

 

괴물과 말춤 조형물의 상징성이 초원사진관의 장소성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 선거에 숨 가쁜 지금의 권력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람의 애착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한 인스타그램 사진이 아니라, 공간을 함께 나눈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의 축적에서만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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