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묻지 마세요
수정 2025.04.09 21:33
김수동 탄탄주택협동조합 이사장
“왜들 그리 남의 나이를 궁금해하나 모르겠어.”
어머니께서 잔뜩 기분이 상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제 90대 중반을 지나 100세를 향해 가는 어머니는 어디를 가도 최고령자이고,
가는 곳마다 당신의 나이가 화제가 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조금만 친해지면 형님, 동생이고 처음 보는 이에게도 이모, 삼촌, 어머님, 아버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정작 나이 확인은 복잡하다.
음력, 양력 생일이 다르다.
누구는 ‘빠른 ○○년’이라 하고 또 누구는 호적이 잘못됐다고 한다.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입학 시기를 정하고 만 나이 기준을 법으로 도입했지만,
나이에 따른 서열문화는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관계에서 나이는 권력이다.
하지만 정작 초고령에 접어들면 나이 권력은 상실된다.
90대 초반의 어머니 친구는 동네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
그런데 자신의 나이가 많은 걸 알면 친구가 싫어할 것 같아 88세로 나이를 속였다고 한다.
나부터도 나이 많은 사람을 대하기가 어렵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나이 얘기하지 않고, 상대방의 나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말도 달갑지 않다.
칭찬이 아니라, 마치 젊음을 기준으로 가치를 매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이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과 우선 나이부터 따지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낸다.
나이도, 결혼 여부도, 아이가 있는지도, 고향이 어딘지도,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묻지 않는 게 좋다.
신상에 관한 사적인 질문은 금물이다.
또 부동산 계급사회인 한국에서는 이제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도 조심해야 한다.
금기가 된 질문이 많아지는 시대이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MBTI를 묻곤 한다.
“E세요? I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T와 F를 비교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가벼운 스몰토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방식이다. 성격 유형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누니 부담도 적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에 나오는 대사다.
이 말을 무기처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또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나이가 아닌 연륜이 빛나는 지혜로운 어른이 많아져야 한다.
먹는 나이야 어쩔 수 없지만 헤아려 세지는 말자.
나이를 따져가며 만나는 관계는 대체로 부담스럽거나 불편하다.
내가 그렇지 않다면 아마 상대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이 나이에 뭘~’ 하는 생각 또한 자기 행동에 제약이 될 뿐, 도움이 안 된다.
청년 지원, 중장년 취업, 노인 복지 등 많은 공공정책이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
연령을 경계로 기회와 지원이 갈리는 것이다.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사업마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하다.
나이만으로 선을 긋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나이가 아니라 개인의 필요와 상황을 고려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이를 떠나 만날 수 있는 사람, 나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아무튼, 내 나이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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