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짓는다 [크리틱]
수정 2025-06-19 13:37 등록 2025-06-18 19:23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 설치된 서도호의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 작품 내부를 관객들이 걷고 있다. 사진 장민경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영국을 여행 중인 지인이 안부를 물으며 책 한권을 선물로 보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김금희 작가의 최근작을 택배로 받게 됐다.
창경궁 대온실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일제 강점기 창경원으로 격하된 근대의 전시 공간에 조성된 대온실은 20세기 초 식민 권력을 증언하는 건축물이다. 실재하는 공간과 직조된 소설에서 주인공은 대온실 보수 공사에 참여해 수리 기록을 담당하며 과거와 맞닥뜨리게 된다.
온실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하 공간을 계기로 과거가 현재에 소환된다.
창경궁 담장 밖 하숙집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주인공의 것이기도 하고, 일본인으로 조선에 살게 된 하숙집 할머니의 것이기도 한 과거는 상흔처럼 남은 기억이다.
주인공과 하숙집 할머니의 시간을 여는 장치는 문고리다.
주인공이 중학생이던 20년 전 하숙집 문고리이자, 하숙집 할머니가 열살 무렵이던 해방 직후의 대온실 문고리였던 유리 손잡이를 통해 지난 시간이 열린다.
지인이 책을 보낸 이유도 손잡이 때문이었다.
마침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서도호의 개인전 ‘집을 걷다(Walk the House)’를 직접 본 지인은 기억을 걷는 경험을 전하며 말했다.
“손잡이가 많더라고요.” 서도호 작가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1999년 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 초청으로 서울집을 반투명 옥색 실크에 한땀 한땀 바느질로 옮겨 지은 이후 그가 살았던 집들을 천으로 다시 짓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에게 천으로 집을 짓는다는 건 옷을 짓는 행위와 같다.
몸이 거하는 최소의 공간이 옷이라면 집은 그 확장판이다.
작가가 청소년기를 보낸 서울집은 한옥이었다.
그것도 일반 가옥이 아닌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을 본뜬 사랑채였다.
작가는 아파트에 살았던 또래와 달리 전통 한옥에서 동양화단의 거목인 아버지 서세옥 화백의 영향 아래 자랐다. 한복 원단으로 지은 서울집이 한옥인 까닭은 그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닌 서도호이기 때문이다.
집은 이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작가는 연약한 몸을 보호하려 딱딱한 껍데기 집을 등에 진 채 이동하는 달팽이처럼 그가 거했던 공간들을 현재 삶에 옮겨낸다. 그의 집 시리즈는 그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확장됐다.
단지 공간의 연결이 아닌 시간의 축적이기도 하다.
이번 런던 개인전에서도 작가는 서울과 뉴욕, 베를린, 런던 등 그가 거쳤던 집들을 한데 모아 천으로 이은 ‘둥지(Nest/s)’를 짓고, 관객이 그 공간을 걸을 수 있게 했다.
사적 공간을 전시 공간에 놓아 관객을 초대한 작가는 신작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을 통해 기억까지도 공유하고자 했다. 그간 살았던 집들에서의 스위치, 콘센트, 문고리를 현재 사는 런던 집 윤곽에 가득 채운, 작가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작품이다. 손잡이가 많더라고 지인이 전한 그 장면이다. 나의 공간이 나의 시간을 의미할 때, 특히 손잡이는 몸이 직접 닿아 손때가 쌓인 나의 흔적이자 결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지은 집은 한마디로 기억이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면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된 하나의 건축물”이다.
작가는 애초 천으로 집을 지을 때 안과 밖이 서로 비치는 반투명 폴리에스터를 택했다.
과거의 시간을 여는 동시에 사적 공간을 여는 의미로 읽힌다.
손잡이는 시공간의 경계를 여는 매개가 된다.
소설 속 장치인 손잡이도 투명한 유리 소재였다. 그 손끝에서 기억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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