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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불 가리지 않기

물불 가리지 않기 입력 : 2023.06.15 03:00 수정 : 2023.06.15. 03:05 오은 시인 물을 마실 때마다 불을 생각한다. 불을 피울 때마다 물을 떠올린다. 물과 불, 이름은 비슷하나 성질은 전혀 다른 두 물질 말이다. 불 위에 물을 올려두고 끓이다 보면 불의 힘이 불끈 솟는 게 느껴진다.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 장면을 보면, 끓어오르는 것을 잠재우는 물의 위력에 새삼 놀란다. 4월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한 산불 소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과 불의 위험성을 깨닫곤 한다. 사람이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지만, 잘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 얼마 전, 각기 다른 자리에서 불같은 사람과 물 같은 사람을 만났다. 불..

칼럼읽다 2023.09.23

아픈 마음과 이해심

아픈 마음과 이해심 입력 : 2023.09.20. 22:58 임경선 소설가 미대 지망생이던 내가 정치학 전공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 미국 뉴욕 공립 고등학교의 역사 수업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유태계 미국인 여성인 바바라 선생님이 이끈 그 수업은 오로지 토론으로만 이루어졌다. 고등학생들은 U모양으로 둘러앉아 그날의 주제를 갖고 찬반 그리고 중간자적 입장의 논지를 자유롭게 발언했고, 간혹 선생님은 조용한 학생들이 먼저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수업은 양쪽 입장의 논리에 대해 수긍할 만한 점을 평가하고 재고할 만한 지점이나 놓친 논점을 짚어준 후, 본 논쟁이 실제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로 마무리되곤 했다.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상황을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일과 상대의 입장에 서서 ..

칼럼읽다 2023.09.23

여행 대신 모험

여행 대신 모험 입력 : 2023.09.20 23:01 수정 : 2023.09.20. 23:02 복길 자유기고가 저자 요즘은 여행 코스를 짤 때 맛집 위주의 동선을 의식적으로 피한다. 식도락 여행은 계획이 쉽고 대체로 높은 만족감을 주지만, 일정을 식사에 맞추다 보니 여행지를 즐길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느껴서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단조로움을 피해 여행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것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식당과 카페가 빠진 계획엔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 드라마 촬영지가 빼곡히 채워진다. 소셜미디어(SNS) 돋보기로 사람들의 사사로운 후기와 사진 명소까지 알뜰하게 훑으면 완성된 계획표에는 여행에서 반드시 의미를 남기고 말겠다는 나의 징그러운 열정만이 가득하다. 여행의 여유는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

칼럼읽다 2023.09.23

가을 국화

가을 국화 입력 : 2023.09.21 20:30 수정 : 2023.09.21. 20:31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우연이 희한하게 겹치는 그런 날이 있다. 붐비는 설렁탕집 건너건너에서 허겁지겁 밥 먹는 이는 좀 전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중년. 짧게 깎은 머리, 후줄근한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 캐나다로 이민 떠난 재종 동생과 어찌 그리 닮았는가. 혹 녀석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몰래 잠깐 귀국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또다시 보아도 그럴 리는 없었다. 그 바람에 흠칫 짐작을 넓혀본다. 주위에 몰래 거처를 숨기고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행방을 감출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겠구나. 투명인간인 듯 두더지인간인 듯. 유학을 떠났다가 학위를 그만두..

칼럼읽다 2023.09.23

[말글살이] 피동형을 즐기라

[말글살이] 피동형을 즐기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원고가 마무리되셨는지요?’ 오늘도 어떤 분에게 원고를 독촉하면서 피동형 문장을 썼다. ‘마무리하셨나요?’라 하면 지나치게 채근하는 듯하여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도 매번 독촉 문자를 받는데 열이면 열 ‘언제쯤 원고가 완성될까요?’ 식이다. ‘원고 완성했어요?’라 하면 속이 상할 듯. 비겁한 피동 풍년일세. 한국어 문장에 대한 가장 강력하면서도 근거 없는 신화가 ‘피동형을 피하라’라는 것. 글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능동형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피동형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 ‘우리말은 피동형보다 능동형 문장이 자연스럽다’, ‘피동형은 영어식 또는 일본어식 표현의 영향이다’. ‘능동형이 자연스..

연재칼럼 2023.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