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38

편집자가 눈에 선해지기까지

편집자가 눈에 선해지기까지입력 : 2024.05.19 20:35 수정 : 2024.05.19. 20:41 이슬아 작가  한창 책을 만드는 시기엔 꿈에 꼭 편집자가 등장한다. 꿈속에서 편집자는 휴양지로 도망친 나를 기어코 찾아내거나(도대체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별 수확이 없을 게 뻔한 나의 텃밭을 둘러보며 해결책을 강구하고(마냥 송구스럽다) 혹은 별말 없이 내 책상 근처에 앉아 그저 커피를 홀짝이곤 한다(이 경우가 가장 신경 쓰인다). 무의식에서도 편집자가 보일 만큼 출간 과정 내내 그를 의식하며 지내는 것이다. 문학 편집자로 일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글을 읽고 돌려주는 피드백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데뷔 전부터 나는 여러 편집자들 근처를 맴돌았다. 무수한 작가들의..

책이야기 2024.05.21

슬플 것 같아요

슬플 것 같아요입력 : 2024.05.20 20:45 수정 : 2024.05.20. 20:46 변재원 작가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장애인 인권교육 강의를 마친 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나에게 장애인이 되어 억울하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된 게 원망스럽냐는 질문이었다. 질문한 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럽지 않다가, 언젠가 문득 원망스러웠다가, 이내 다시 원망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연이은 수술을 거치며 줄곧 병실에 누워 있던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삶은 힘겨웠지만, 이상하게도 의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장애, 마비, 질병을 감내하는 시간 자체는 나에게 원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문득 스무 살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고, 처음 좋아하는 사..

칼럼읽다 2024.05.21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 2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 2입력 : 2024.05.19 20:44 수정 : 2024.05.19. 20:45 서정홍 산골 농부  ‘부자’란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얼마나 재산이 많으면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기도 아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한 사람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더구나 요즘 부자는 3년이 아니라 30년, 300년을 일하지 않고도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한다. 오늘 아침 TV 뉴스를 보던 마을 어르신이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아이고, 저 썩을 놈은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가도 무신 걱정이 있겠노.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은행에 넣어둔 이자가 불어난다 안 카나.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아이가. 그라이 우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겠노..

칼럼읽다 2024.05.20

돌봄 살인

돌봄 살인입력 : 2024.05.19 20:40 수정 : 2024.05.19. 20:41 김만권 정치철학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지난 5월3일 대구지방법원 법정에서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토로한 절규에 가까운 참회였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했던 걸까? 아버지의 비공식적인 죄명은 ‘돌봄 살인’이었다. 아버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서른아홉 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1984년 아이가 이 세상에 온 이후 아버지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의 돌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자 시설에 맡기기도 했지만 10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

칼럼읽다 2024.05.20

착한 사람이 지닌 힘

착한 사람이 지닌 힘입력 : 2024.05.14 20:21 수정 : 2024.05.14. 20:22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착하면 손해 본다’는 게 통념이다. ‘착하다’는 말이 자기주장 없이 남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면의 욕구를 무시한 채 부모의 기대에만 부합하려고 애쓰다 보면 성인이 되어 병리적인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더해져서, ‘착함’은 더 이상 추구할 덕목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휘사 연구에 의하면, ‘질서정연한 모양이나 동작’을 가리키는 ‘착’이라는 만주어가 17세기 후반 우리말에 유입되어 ‘분명하고 바람직한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형태소로 쓰이기 시작했다. ‘착하다’는 18..

칼럼읽다 2024.05.19

비지의 열 번째 뜻

비지의 열 번째 뜻입력 : 2024.05.15 20:54 수정 : 2024.05.15. 20:55 오은 시인  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칼럼읽다 2024.05.18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입력 : 2024.05.16 20:46 수정 : 2024.05.16. 20:50 김해자 시인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 크게 자라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

책이야기 2024.05.17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입력 : 2024.05.14. 20:24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단과대 리모델링 공사로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수년 동안 사용해왔던 공간은 문고리가 헐거워 문이 저절로 열릴 때가 많았다. 시설과 선생님께 말씀드려 몇 차례 손보았지만 여전했다. 그러니 주말이나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일할 때면 안쪽에서 문을 잠가두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FM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드니 닫아둔 문이 어느새 또 스르르 열려 있었다. 볼륨을 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어폰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으니 복도에 얼마간 음악소리가 들렸을 테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오후였고, 같은 층..

칼럼읽다 2024.05.16

같이 읽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같이 읽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부유할수록 책을 많이 읽고, 가난할수록 책에서 멀어진다. 공공도서관, 서점이 부족한 지방도 책에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독서를 순전히 개인적 행위로 간주하고 책을 시장에 맡기면 이런 불평등을 교정할 길이 없다. 공공도서관과 지역서점을 포함한 독서생태계 형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수정 2024-05-14 19:37 등록 2024-05-14 19:15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밤 열두시에 문 닫는 거는 인자 고마하입시더. 그 시간에 누가 온다꼬.” 어머니는 애절했다. “안 돼요. 책방을 열어둬야 길이 환하지. 책 사는 학생들도 있고.” 아버지는 단호했다. “새벽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말이 됩니꺼? 사람 쫌 삽시더.” 책방 ..

책이야기 2024.05.15

감정 규칙

감정 규칙입력 : 2024.05.09. 20:28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어도어 대표이사 민희진의 기자회견이 연일 화제다. 성공한 여성이 격에 맞지 않게 ‘격앙, 눈물, 욕설’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며 비판한다.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라는 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평정 유지는 대면적 상호작용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감정 덕목이다. 함께 있는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정을 잃으면 당사자는 물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조차도 당혹감에 빠진다. 민희진은 평정을 잃고 감정을 날것 그대로 공중에 드러냈다. 옆에 있던 변호사 두 명이 어쩔 줄 몰라하며 상황 수습에 급급하다. 사회학자 혹실드는 모든 상황엔 ‘감정 규칙’이 있다고 했다. 감..

칼럼읽다 2024.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