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여성보다 로봇

닭털주 2022. 4. 11. 22:05

여성보다 로봇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212일 오후 보신각 앞에서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의 정치를 부수자'를 주제로 열린 집회에서 대선후보들에게 보내는 문구를 적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우리의 경우, 극우 혐오정치는 인종적 배타성이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 더 정확하게는 능력없는 자에 대한 경멸과 폄훼로 발현된다.

이들에 따르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

장애를 가진 것,

가난한 부모를 둔 것,

비정규직이 된 것 등이

한결같이 개인의 무능력 때문이다.

 

샬러츠빌 시위에서처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전면에 등장한 저학력 저소득 백인의 분노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라기보다는 무너져 내린 생계를 책임지라는 절규에 가깝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몇년 전 나의 연구과제에 참여한 한 심층면접 대상자의 목소리이다.

우리 세대가 8·15 해방에 태어나 6·25사변, 월남 갔다 오고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한 세대인데, 사회에서 복지에 대해 65세 넘으니까 고작 패스 하나 주고 젊은 사람보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니까 필요할 때 써먹고 조금 안 좋은 일 있으면 자르고여성가족부는 있는데 왜 노인부는 없습니까?”

 

이 고단한 노인조차 여성가족부를 없애기보다는 노인부를 만들라는 건설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데, 극우 정치를 지지하려면 고령의 태극기집회 참여 세대의 서사 정도는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학벌 좋은 멀쩡한 비장애인 젊은이들까지 우아한 궤변으로 소수자를 조롱하는 것이 정치적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런 분할 지배 전략이 과연 성공적일까?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실시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전통적인 젠더 관념에 위협적인 질문으로 유도한 경우, 힐러리 클린턴에게 우호적인 남성의 답변이 그런 질문이 없었을 때보다 더 감소한 것은 사실이었다. 부인보다 소득이 적어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개인적인 위협을 느끼든 아니면 전반적인 사회제도가 여성편향적이라 판단하든 이런 생각은 모두 클린턴보다 트럼프를 더 지지하게 했다.

그러나 모든 남성이 이런 것은 아니었다.

선택편향을 제거한 더 정교한 패널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아내보다 소득이 적어진 보수적인 남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보수적으로 변했지만, 그렇게 된 진보적인 남성은 더 진보적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실시한 미국의 정치학자 댄 커시노는 전통적인 생계부양자 역할을 고수하지 않는 이런 남성들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가장 큰 희망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번 2022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보수적 투표행위에 대해 많은 분석이 쏟아졌지만, 20대 전체는 진보적인 후보를 더 많이 선택했다.

윤석열 당선자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는 10명 중 6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진보적인 20대 여성이 정치세력화하고 있고,

분할 지배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20대 남성이 있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박빙의 선거에서 특정 세대, 특정 성의 과반 지지의 중요성이 과장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언론부터 이들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지칭하는 조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은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할 때이다.

샬러츠빌 시위의 진짜 원인이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아니었듯이, 우리 청년 문제의 핵심도 여성이나 여성가족부가 아니다. 로봇이다. 극단적인 사회의 양극화이다.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의 예측에 따르면 지금도 일자리의 반 정도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되어 있고, 30년 안에 실제로 과반 이상의 일자리가 자동화될 것이라 한다. 그 와중에 극소수의 거대 기업과 부동산 부자만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분열과 혐오의 정치를 지속하는 것은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최저임금을 일자리 감소와 자영업 황폐화의 유일한 원인으로 지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완전고용과 평생고용의 시대에 마련한 빈약한 분배와 재분배 정책, 수십년 전과 똑같은 이해충돌에 찌든 고위 행정인력으로는 이런 최첨단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만이 가장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