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부글·풍덩…감정에 색깔 입히는 의성의태어 [.txt]
신견식의 세계 마음 사전
추상적 감정 구체화하는 의성의태어
한국·아시아·아프리카어에 많아
복잡한 감정의 결 살려 생동감 더해
수정 2025-05-24 17:51등록 2025-05-24 02:00
‘부글부글’은 원래 액체가 계속 야단스럽게 끓어오르는 소리나 모양을 일컫는데 울화나 분노, 언짢은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도 빗댄다. 게티이미지뱅크
언어 기호의 자의성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주창한 이래로 널리 알려진 언어학의 기본 개념이다. 예컨대 한국어 ‘나무’, 중국어 ‘木’, 영어 ‘tree’의 말소리는 이것이 일컫는 말뜻과 아무 상관이 없다. 추상명사로 가면 그 정도는 더한데 ‘사랑’, ‘愛’, ‘love’가 왜 하필 그 뜻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말이 이렇지는 않다.
한국어 ‘까치’와 ‘깍깍’은 일본어 カササギ[가사사기]와 カアカア[가아카아]에 대응하는데 이 동물 이름이 꼭 의성어에서 유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영향 관계는 있을 것이다. 영어 crow(까마귀)는 ‘수탉 울음소리’도 뜻하며 어원을 따지면 의성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음성 상징 자체도 상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멍멍, 꼬끼오, 쨍그랑, 털썩, 풍덩 따위의 의성어가 이런저런 언어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꼴을 보일 수는 있어도 당연히 똑같지는 않기에, 성대모사나 몸짓 없이 한국어 발음 곧이곧대로 외국인에게 들려준다면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자연이나 사물이 내는 음향을 분절성을 지닌 언어음으로 그대로 바꿀 수 없고 언어마다 음운 체계도 다르기 때문이다.
예사소리(ㄱ, ㄷ, ㅂ, ㅅ, ㅈ), 된소리(ㄲ, ㄸ, ㅃ, ㅆ, ㅉ), 거센소리(ㅋ, ㅌ, ㅍ, ㅊ)를 구별하는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울 때 이와 다른 대다수 언어의 화자가 애를 먹듯이, 각 언어마다 인식도 다른데 하물며 비언어적 요소를 말소리로 치환하는 과정이 언어마다 같을 리 만무하다.
한글이 모든 소리를 표현한다는 우스개 반 진담 반의 말들은 자민족 중심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딴 의성어는 몰라도 아기 울음소리 ‘응애/응아’는 꼭 분절음 응애응애[ɯŋɛɯŋɛ]처럼 들려 딱 들어맞는 느낌도 든다. 한국어처럼 ㅇ[ŋ]을 음소로 가진 영어는 의성의태어가 아주 많지는 않은데 딱히 아기 울음소리에 해당하는 정해진 말도 사전에 없고 wa나 waa로 나타낸다. 의성의태어가 비교적 많고 ㅇ[ŋ] 음소도 있는 중국어도 아기 울음이 哇哇[와와]라서 영어와 비슷하다.
한국어의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요소 중 하나가 풍부한 의성어와 의태어다.
이는 막연한 인상평이 아니고 언어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물론 영어도 이런저런 의성어를 비롯해 glitter(반짝반짝), glimmer(깜박깜박), glow(이글이글)처럼 빛과 관계된 동사에 ‘gl-’이 붙고 flap(파닥파닥), flutter(나비가 훨훨, 깃발이 펄럭), fly(날다)처럼 날갯짓과 연관된 동사에 ‘fl-’이 붙듯 음성 상징성이 있다. 하지만 어휘 체계 안에서 의성의태어가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문법적으로도 체계적인 모습을 보이는 현상은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에 많다.
일본어도 한국어처럼 크게는 의성어와 의태어로 가르지만, 더 자세히 분류하기도 한다. 사람이나 동물의 소리는 의성어(擬聲語: 깔깔, 음매), 자연이나 사물의 소리는 의음어(擬音語: 콸콸, 댁대구루루)로 나눈다. 무생물의 모습이나 상태는 의태어(擬態語: 번쩍, 폭신폭신), 생물의 상태는 의용어(擬容語: 어슬렁어슬렁), 사람의 심리나 감각은 의정어(擬情語: 두근두근, 욱신욱신) 등이다.
의성어나 의태어의 경계가 늘 명확하지는 않고 같은 말이라도 어떤 때는 둘 중 하나로만 분류되기도 한다. ‘덜덜’은 몸을 떠는 모양을 일컬을 때는 의태어, 바닥을 구르며 흔들리는 소리나 꼴이라면 의성어, 의태어 둘 다 된다. 굴러가는 것을 묘사하는 ‘데굴데굴/대굴대굴’은 의태어로만 간주되는 반면 ‘또르르/도르르’는 의성어도 의태어도 되며, 후자는 폭이 좁은 종이 따위가 탄력 있게 말리는 모양을 일컫는 의태어가 동음이의어로도 있다. 앞서 말했듯 자연이나 사물의 소리는 분절음이 아니라서 그 인식이 언어 집단마다 다를뿐더러 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 일본어 ごろごろ[고로고로]가 우르르(천둥), 데굴데굴, 빈둥빈둥, 꼬르륵(배) 따위를 골고루 뜻하듯 심상과 언어의 관계는 단선적으로 나타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의성의태어도 새말이 자주 만들어진다.
감정은 소리가 들리지 않고 모습을 볼 수도 없으니 언뜻 의성의태어로 나타내기 힘들 것 같으나, 오히려 그렇게 바로 언어로 이어 서술하기 까다롭기에 의성의태어와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감정을 서술할 때 ‘슬프다’나 ‘기쁘다’ 같은 일반적인 형용사보다 비유나 은유처럼 빗대거나 암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많다. 이를테면 ‘부글부글’은 원래 액체가 계속 야단스럽게 끓어오르는 소리나 모양을 일컫는데 울화나 분노, 언짢은 생각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도 빗댄다. ‘화나다’, ‘화가 끓어오르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를 견줘보면 핵심적인 의미는 같아도 뉘앙스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영어 동사 bubble(거품이 일다, 보글보글 끓다)이나 boil(끓다)도 이런 용법으로 쓰이며, ‘부글부글’과 소리가 비슷한 이 말들의 유래도 궁극적으로 의성의태어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의성의태어는 생생한 연상 작용을 일으켜 추상적인 감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한다.
감정적 의사소통의 상당 부분은 표정, 몸가짐, 몸짓, 웃음, 울음, 말투, 목소리 크기와 같은 비언어적 또는 준언어적 단서에 좌우된다.
‘나는 기쁘다’라고 글로만 서술하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수도 있으나 말소리를 들으면 감정이 충분히 파악된다. 댓글이나 메신저처럼 글로 쓰는 입말에서 이모지나 이모티콘을 많이 쓰는 까닭도 비슷하다. 의성의태어는 언어적 구성 요소이지만 비언어적이거나 준언어적인 성격도 많이 지니는 편이다. 언어는 감정의 복잡한 결을 담는 데 제약이 있지만 의성의태어는 여기에 울림과 색깔을 더해 생동감을 입힌다.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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