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배회하는 사람들
수정 2025.05.19 20:45
심완선 SF평론가
친구가 지금도 ‘피크민’을 열심히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피크민이라는 색색의 조그마한 생명체와 함께 다니는 게임 ‘피크민 블룸’ 이야기였다. 게임 플레이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모바일 기기에서 게임을 실행하고, 어디로든 냅다 걷는다. 그러면 나의 위치 정보를 토대로 게임 속 증강현실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따라 꽃이 심어지고, 피크민이 졸졸 쫓아온다. 남들이 심은 꽃을 보거나 새로운 피크민 모종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그게 얼마나 건실하고 건강한 활동이냐며 얼른 맞장구를 쳤다.
여기에 푹 빠진 사람들은 일부러 산책을 나선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평소보다 일찍 내리고, 주변의 건물이나 골목을 하나하나 탐방하고, 외출할 일이 없는 때에도 밖으로 나간다.
많이 걸을수록 피크민 세상이 다채로운 색깔과 소리로 채워진다.
산책길이 아름답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솔직히 현대사회에서 걷기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수단이다.
자동차를 타면 20분 만에 도착할 곳이라도 걸어가려면 네 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하다못해 자전거나 킥보드도 걷기보다는 훨씬 편하고 빠르다.
걸어서 출퇴근하거나 통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지금 사람들은 인간의 보행속도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규모의 생활반경을 유지한다. 하물며 몸이 걷기에 여의치 않은 경우나, 험한 길이나 나쁜 날씨는 또 얼마나 많은지.
이동 방법으로 평가하자면 걷기는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다.
도시의 도로는 차량을 위한 것이며 보행자는 그야말로 곁길(sidewalk)로 다니는 존재다.
걷기는 작고 느리다.
걸어 다니는 동안에는 누구든 어쩔 수 없이, 옛날처럼 천천히 하나하나 발을 디뎌야 한다.
덕분에 길을 걷다 보면 자질구레한 요소들이 생생하고 큼직하게 살아난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막 깨어난 싱그러운 아침, 나는 유명 호수가 있는 대도시를 출발하여 거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호수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가는 도중에는 오직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산책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것들만을 마주쳤다. 스케이트를 타는 몇몇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고, 이것이 전부이다. 예쁜 꽃들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이것이 전부이다. 또 나 자신과 즐겁게 대화를 시작했고, 이것이 전부이다.”
이 산책에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뿐이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각기 ‘전부’로 등장한다.
물론 게임 플레이를 위해 걷는 행위가 ‘산책자’의 경험과 똑같을 수는 없다.
게임은 목표 지점과 보상을 규정하지만 산책자는 목적 없이 배회하고 관찰하는 사람이다.
발저는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안다고 썼다.
프랑스어 ‘플라뇌르(flaneur)’나 ‘플라뇌즈(flaneuse)’로 대표되는 지난 세기의 도시 산책자들은 아마추어 탐정처럼 호기심을 품고 도시의 풍경을 포착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도 걷는 행위에 내재된 자율성은 비슷하게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최적의 경로를 검색하는 대신 매 순간 직접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동안이라면 어디로 향하든 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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