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라, ‘돌봄 넋두리’를 [똑똑! 한국사회]
수정 2025-04-24 08:54등록 2025-04-24 07:00
조기현 | 작가
지금 우리는 초고령사회에 산다. 내란이 한창이던 지난 연말, 한국은 65살 이상 고령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올해 3월 발표된 치매 역학조사에서는 내년이면 치매 환자가 100만명을 넘어선다고 예측한다. 1000만 관객, 100만 조회수같이 영화나 유튜브의 흥행을 표상하는 숫자가 이제는 돌봄 부담을 표상하는 숫자가 됐다. 이 숫자에 도달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내가 처음 병원에서 ‘보호자님’이라고 불린 지 14년이 흘렀다.
그사이 20살이던 나는 30대 중반이 됐고, 49살에 쓰러졌던 아버지는 곧 65살 노년을 앞두고 있다. 뭐든 14년 정도 하면 요령도 생겨서 할 만해질 텐데, 어쩐지 돌봄은 그렇지 못하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질병 상태에 따라 병원 다니기에 바쁘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여전히 허둥거리기 일쑤다. 일과 돌봄 사이를 조율하는 건 나름 잘하다가도 가끔 버거워 욱하게 된다.
엊그제는 불안해서 잠을 못 잤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요양등급을 다시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요양등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요양보호사님이 집에 오지 못하면 아버지는 고립되고 나도 혼자 다 돌봄을 짊어져야 하나.
필요한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할까 봐 잠들지 못하는 밤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눈에 보이는 정책의 가짓수는 늘어났다.
전국에 치매안심센터가 깔렸고, 지역마다 통합돌봄 시범사업이 시행됐다.
간병 부담 완화를 위해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나 간병비 지원이 생겼고,
누군가를 돌보는 청년이나 돌봄이 필요한 중장년을 위한 일상돌봄서비스도 만들어졌다.
2022년 기준으로 성인돌봄 예산은 21조4천억원을 넘겼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이 지디피(GDP)의 1~2% 비율을 성인돌봄 예산으로 쓰는 것과 맞먹는다.
결코 적지 않은 예산을 쓰는데, 우리는 그만큼 안전한 돌봄을 보장받고 있나?
정책 종류와 예산이 느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간병살인 비율도 함께 늘었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간병살인 비율은 2000년대 한해 평균 5.6건에서 2020년대 18.8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 21일에도 치매와 지병이 있던 70대 친형을 집에서 돌보다가 살해한 60대 남성이 구속됐다. 돌봄 예산은 예산대로 늘어나는데, 외려 비극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난다. 돌봄 정책과 돌보는 삶의 간극은 왜 이리도 벌어져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돌보는 이들은 넋두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겪은 엎친 데 덮친 격의 돌봄 부담들을 다 말할 수 있는 언어도, 들어줄 귀도 없다.
어렵게 취직했는데 첫 출근에 어머니가 쓰러져 일을 못 한 이야기,
복지나 돌봄서비스들의 기준을 다 비켜 가서 아무런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이야기,
조현병이 있는 동생이 정신병원에서 나왔는데 지역사회에서 아무런 지원이 없어서 다시 입원해야 했던 이야기.
들어줄 이라도 있으면 했던 말 하고 또 하면서 분하고 억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그나마 조금씩 해소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초고령사회를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돌봄의 넋두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돌보는 이에게 위안을 주자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 상존하는 문제임에도 제대로 논의된 적 없는 이야기를 먼저 알리는 비상경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말이 되지 못한 넋두리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어떤 대안적 세계를 담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고민 끝에, 조기 대선에 맞춰 ‘100인 돌봄시민회의’를 준비했다.
5월10일 토요일, 100명의 돌보는 이들이 모여 나의 돌봄 이야기도 실컷 하고, 그 속에서 돌봄정책 시민 공약을 추출해보면 어떨까. 이 자리는 대화 시간을 분배해줄 모더레이터, 사적 이야기에 공적 상상력을 더해줄 정책 멘토, 과거 고통스러운 순간이 전이될 것을 대비한 심리안전 전문가까지 함께한다. 가장 사적인 돌봄의 목소리에서부터 돌봄의 공적 대안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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