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292

역사가 결코 우리를 파괴할 수는 없다

역사가 결코 우리를 파괴할 수는 없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드라마 의 한 장면. 애플tv플러스 제공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민진 작가의 소설 의 첫 문장이다. 문학사상의 한국어판 에는 이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낙제했을 때 쓰는 단어인 페일(fail)이 망치다로 번역된 것이다. 전문가가 번역을 했으니 틀림없겠지만 어쩐지 거꾸로 번역을 한다면 망치다라는 표현에 루인(ruin)이 먼저 떠오른다. ‘루인’은 짓밟는 폭력을 연상시킨다. 실패, 낙담을 떠오르게 하는 단어 페일(fail)의 폭, 어쩌면 소설 의 힘은 바로 이 진폭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애플tv플러스가 제작한 드..

책이야기 2022.04.13

파친코· 피와 뼈…이야기는 힘이 세다

파친코· 피와 뼈…이야기는 힘이 세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세계대전과 독일의 만행에 관한 문학과 영화들은 차고도 넘친다. 등의 유명작들에 이어 2020년 오스카에서 주목받은 까지. 놀라운 것은 반세기 이상 반복되는 이 식상한 소재가 늘 새로운 서사로 변주되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해준다는 점이다. 는 독일장교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 여인의 고뇌와 절제된 감정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바 없는 집단의 갈등과 개인의 원초적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을 조명한다. 는 가족이 몰살당한 땅 ‘폴란드’란 단어를 평생 금기로 삼고 기차 환승 중에도 단 한 뼘의 독일 땅도 밟지 않으려는 완고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태극기 부대의 트라우마를 조금은 이해하고 싶게 만든다. 나치에 관한 많은 스토리들은 입체적이며 현재적이다. 전쟁과 ..

책이야기 2022.04.13

어느 소설가의 네 가지 연애담... '사랑'을 다시 배웠습니다

어느 소설가의 네 가지 연애담... '사랑'을 다시 배웠습니다 [부커상 미리 읽기] 박상영 지음 '대도시의 사랑법' 22.04.06 19:24l최종 업데이트 22.04.06 19:24l김현진(slowsteps) 박상영 작가의 과 정보라 작가의 가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렸습니다. 오는 7일, 부커상 재단은 롱리스트에 오른 후보작 13편 중 최종 후보작(쇼트리스트) 6편을 선정해 발표하는데요. 또 다시 낭보가 전해질지 관심이 모이고 있는 지금, 이번에 롱리스트에 오른 작품 을 읽어봤습니다. [편집자말] 박상영 ▲ 박상영 ⓒ 창비 허구가 현실보다 진실할 때 이성애자로 살아온 내게 동성애의 세계는 미지의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음에 동의..

책이야기 2022.04.11

최재봉의 탐문 _12 유토피아 .. 천국과 지옥 사이, 유토피아

천국과 지옥 사이, 유토피아 최재봉의 탐문 _12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낸 는 모어 자신이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라는 인물을 만나 그가 경험한 이상 국가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히슬로다에우스’는 그리스어로 “허튼소리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풀이되며, 그 점은 “어디에도 없는 곳”을 뜻하는 ‘유토피아’와 함께 이 책의 내용이 한갓 공상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말년 단편 ‘우스운 인간의 꿈’(1877)의 주인공인 화자는 어느 날 꿈속에서 지구를 벗어나 외계 행성으로 여행을 한다. 지구를 빼닮은 그 행성에서 사람들은 “음식과 옷을 얻기 위해 아주 가볍게 조금씩만 일했”고, 사람들 사이에는 “다툼도 질시도 없었”다. 신앙이 없었음에도 “절대..

책이야기 2022.04.09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문정희 | 시인 이 봄날 전염병에 쫓기는 것도 기막힌데 지구 위에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의 무력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피난을 떠나고 있다. 다른 나라로 떠나는 기차에 매달려 우는 할머니와 어린아이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정말 잔인한 봄이다. 생명이 죽어가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구경하다니… 어느 신이 이것을 용납할 수 있으랴. 사방에 꽃은 덧없이 피어나는데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봄이다. 일찍이 시인 영랑이 노래한 “찬란한 슬픔의 봄”은 어떤 봄일까. 진정한 봄은 언제 올 것인가.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시는 써서 뭐 하나. 우크라이나 오데사국립대학으로부터 시낭송 초청을 받은 것은 지지난해였다. 유명한 베를린 국..

책이야기 2022.04.09

개수대에 쌓인 컵들... '식세기'가 답은 아닙니다

개수대에 쌓인 컵들... '식세기'가 답은 아닙니다 50대에 더 와닿는 '월든'의 문장... 비우고 간소화 하는 삶에 대하여 22.04.03 19:50l최종 업데이트 22.04.03 19:51l전윤정(monchou3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얼마 전, 시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된 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시인으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슬럼프에 빠졌던 50대에 그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을 읽었다. 오늘날 그의 인생과 시가 있게 한 것은 오로지 그 책 한 권 덕분이라며, 은 인생 후반기의 나침반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사실 작년부터 이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화제가 된 드라마 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매일 꺼내 보는 책은 ..

책이야기 2022.04.07

이수지 작가, 한국인 최초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수상

이수지 작가, 한국인 최초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수상 이수지 작가. 비룡소 제공 이수지 작가가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이하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 국제어린이도서협의회(IBBY)는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개막에 맞춰 연 기자회견에서 이 작가를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국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가는 2016년에도 이 상의 최종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안데르센상은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기념하기 위해 1956년 만들어진 상으로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2년마다 ‘아동문학에 중요하고 지속적인 기여를 한’ 글, 그림..

책이야기 2022.04.07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고명섭의 카이로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최저 임금 제도’나 ‘노동 시간 규제’ 같은 사회적 방어 장치를 뜯어내겠다는 공언이 유력 후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자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는 발언이다. 구성원 다수의 취약한 인간성을 보호하는 장치를 철폐하는 데 국가 권력을 쓰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 위키미디어 코먼스 니시다 기타로(1870~1945)는 일본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한 사람이다. 일본 전통 불교 사상을 바탕에 두고 서양 철학의 언어와 개념을 자재로 삼아 자기만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 니시..

책이야기 2022.04.03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작은 것이 작게 느껴지지 않는 삶 (하) / 서총명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작은 것이 작게 느껴지지 않는 삶 (하) / 서총명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사람이 치사해지는 게 한순간이었다. 쿠팡, 신문배달 아저씨들과 엘리베이터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엘리베이터를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다니 참 유치한 일이지만 그렇게 됐다. 내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는 날에는 독점하기 위해 배달이 15층이면 15층, 16층을 함께 눌렀다. 서총명 | 맨홀 점검 노동자 한 가지 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는 시대이다. 부업을 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서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우유배달을 선택했다. 일주일에 3일만 배달하면 되고, 시간도 내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새벽 1시쯤 대리점에서 그날의 우유를 수령하는데, 배달..

책이야기 2022.03.24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작은 것이 작게 느껴지지 않는 삶 (상) / 서총명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작은 것이 작게 느껴지지 않는 삶 (상) / 서총명 2020년 8월 도로 위에서 맨홀 점검을 할 때, 다른 안전장치 없이 라바콘만 세워둔 채 작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서총명 제공 2019년에는 우유배달을 했고, 2020년부터 맨홀 점검 일을 했다. 우유배달은 7개월간 서울 목동지역에서 했다. 이후 2020년 6개월간 하수도 맨홀 점검에 이어 2021년 역시 같은 시간만큼 상수도 맨홀 점검 작업을 했다. 이 글은 상하수도 맨홀 점검과 우유배달에 관한 비정규 노동 일지다. 상수도와 하수도는 도시위생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공급은 상수도로, 배출은 하수도로 이뤄지는데 이 상하수도의 청결이 도시와 시민들의 위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길을 가다 보면 같..

책이야기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