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닭털주 2022. 3. 2. 18:29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부끄럽게도 내가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서였다.

돌아보니 대학 졸업 이후 40년을 훌쩍 넘긴 세월동안 나는 소설을 읽지 않았다.

직장 말년에 러시아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여러 명소들을 관광했었는데 러시아 예술과 문학을 안내하는 현지인들의 얼굴에서 넘치는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거닐며 이 가로가 소설 죄와 벌의 배경 장소라는 설명을 들을 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사서 읽었다. 나 자신에 대한 속죄의 심정으로 읽었다. 이후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나는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누가 내게 당신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해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속물이 되기 싫어서.”

은퇴 이후 지금까지 나는 속물로 살기 싫어 소설을 읽어왔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인생말년에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교양인으로 살기 위해서다.

직장생활 33년을 나는 그야말로 속물적 인간으로 살아왔다.

굳이 변명하자면 내가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승진에 더 많은 급여, 거기에 목매달며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남보다 잘 되는 것, 그것 하나 외엔 아무 것도 쳐다볼 줄 모르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문화생활? 쪽팔리게도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1년에 두세 번 아내와 같이 소문난 영화를 보는 게 거의 전부였다. 박사학위도 받았고 고연봉에 제법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내가 앉은 자리에는 썩은 구린내가 났다. 안타깝게도 그런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한참 늦은 나이에야 깨달았다. 아는 거라곤 좁은 전문 영역의 일뿐, 지독히도 단선적인 인간이 나라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속물은 단순한 인간이다.

단순한 인간이 문제라고? 단순하게 사는 게 얼마나 좋은 삶인데.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다.

단순하게 사는 건 분명 권장할만한 좋은 삶의 태도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산다고 세상만사를, 다른 사람의 삶을 그런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의 삶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태도다.

인간은 결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일하며 돈 벌고 잠자고 먹고사는 것이 전부인 존재가 결코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의 정신은 무궁무진하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괴로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아무리 나 자신 단순한 삶을 추구하며 산다 해도 내 안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모른 체하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향한 내면의 울부짖음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내면과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소설을 통해 그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내가 외면하는 나, 내가 모르는 타인을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알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에세이 읽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가해자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뉴스에서는 피해자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우리가 샤를리 에브도/에릭 가너/이라크다라고 외치면서 피해자와의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설은 우리가 라스콜니코프’, ‘롤리타’, ‘히스클리프라고 말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독선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가해자의 내면이 어느 정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한편 독자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나쁜인물의 이야기를 오래 읽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복잡하게 좋은사람의 이야기는 그보다는 흥미롭겠지만 복잡하게 나쁜사람의 이야기만은 못할 것입니다.

(김영하, 읽다, 문학동네, p.173)

 

나쁜 인간을 보는 두 개 시선이 존재한다.

단순하게 나쁜 인간으로 보는 시선과 복잡하게 나쁜 인간으로 보는 시선이다.

전자가 법률적 도덕적 관점의 시선이라면 후자는 문학적 시선이다.

소설을 읽기 전 나는 인간을 오로지 법률적 도덕적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이해했다. 그래서 나쁜 인간, 못난 인간은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는 그 자체로 나쁜 인간이고 못난 인간일 뿐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마음을 내어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을 버렸다. 이제 내게 나쁜 인간, 못난 인간은 그냥 나쁜 인간, 못난 인간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삶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복잡하게 나쁜 인간이고 못난 인간으로 다가온다.

결국 소설의 서사는 복잡하게 나쁜 인간과 못난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평소 같으면 외면하고 말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그의 이야기가 곧 숨겨진 나의 내면의 한 부분임을 안다.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죄와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세상의 호의호식하는 좋은 인간들보다 훨씬 더 고뇌하는 나쁜 인간이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단순히 자기 책임을 방기한 광인 화가가 결코 아니다.

허삼관 매혈기의 주인공 허삼관은 그냥 못 배우고 가난한 못난 인간이 아니다.

햇살에 눈이 부셔 살인을 저지른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나는 단순히 단죄자로서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와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를 단순히 탐욕과 허영에 물든 인간으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내게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안에도 그런 감정과 욕구와 고뇌가 잠재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들이다.

 

나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페터 비에리의 다음 말에 공감한다.

문학적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싸움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문학적 이야기가 가진 정신은 의구심의 정신이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정신입니다. 모름에 대한 인정은 이야기의 화자조차도 인물의 깊이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나타낼 정도로 등장인물이 가진 깊이에 대한 존중을 동반합니다. 이런 존중심을 가지고 등장인물들 안에 쏟아부을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열어놓습니다. 등장인물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결국 그 인물 자체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활짝 열어젖힌 상상의 통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페터 비에리, 교양수업, 은행나무, p.73)

 

소설이 열어놓는 것, 그것은 결국 내게 던지는 질문이다.

소설만큼 인생의 의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분야의 책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내게 사색이란 바로 이 위대한 소설들의 작중 인물들이 던진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싫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반대로 그것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당연히 내게도 소설이 던지는 질문들은 골치 아프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정답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숨쉬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을 사색하며 나는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비록 나이가 들어 육체적 성장은 멈추었지만 소설을 읽고 사색하는 한 나의 정신적 성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설 읽기를 통해 나는 현실에 고착된 인간이 아니라 더 큰 환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것은 내 삶의 무한한 가능성이요 확장이다.

 

이상하게도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나는 한 번 읽었던 소설을 또 읽기를 좋아한다.

첫 번 읽었을 때 찾지 못했던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읽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에 나오는 영원회귀에 관한 질문이 궁금해 나는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읽은 소설이 이제는 제법 많아졌음을 확인한다. 덩달아 이런 과정을 거쳐 쓴 서평과 독후감도 제법 늘어났다. 나는 책장에 꽂힌 낡은 소설책들을 볼 때마다 묘한 성취감을 느낀다.

내겐 이런 소설들이 고전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칼비노가 한 다음 말이 나에게 힘찬 격려를 준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ooo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ooo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책이다.”(김영하, 위의 책, p.11)

 

[출처]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작성자 윤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