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닭털주 2022. 3. 3. 17:5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책방

 

강맑실 | 사계절출판사 대표

 

 

비는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을까. 지난해 5월은 한달 내내 비가 내렸다. 일산에 있는 동네책방을 찾아간 그날도 비가 왔다. 책방에서 독자들과 미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 속에서 비는 순한 안개비로 바뀌어 있었다.

나를 갈아 넣어가며 책방 일을 하고 있어요.”

생맥줏집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켠 책방 주인장이 말했다. 여느 책방 못지않게 독자를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과 저자 강연을 일년 내내 진행하면서 동네 네트워크의 한축을 일궈낸 분이었다. 생맥줏집 천장의 불빛 탓인지 얼굴은 창백했고 커다란 눈은 허공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를 갈아 넣으며 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말 하지 마.”

옆에 앉은 누군가 내뱉듯 툭 던진 말에 주인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이미 가슴이 쿵, 내려앉은 후였다. 치킨을 뜯으며 생맥주와 함께 나눈 경쾌한 대화가 그 말을 뭉개고 지나갔지만 그 말이 나에게 남긴 통증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책꽂이에서 뽑아 든 책은 <무정에세이>였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무연한 것들을 무심히 발견해내는 서늘함이 녹아 있는 책이다.

침대맡에서 밑줄 그은 부분을 뒤적이다 그날따라 눈이 머문 구절이 있었다.

네팔 트레킹을 하던 저자의 친구가 며칠 동안 숙소를 찾지 못해 지쳐갈 무렵,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다가가 보니 그건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다. 건물처럼 보였던 건 돌로 쌓은 멀쩡한 벽의 한면이었고 벽 뒤쪽은 그냥 허공이었다. 짓다가 만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 허공이 책방 주인장의, 아니 우리 모두의 실존의 그늘처럼 느껴져 마음속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책, 그 모순 때문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욕망과 권리를 결박당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책, 그러한 뜻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해왔던 난 과연 누구의 무엇에 얼마만큼 공감하며 살아왔던가. 이런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그날의 통증을 안고 전국의 동네책방 대표들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그것은 내가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은 하나의 성스러운 순례와도 같았다.

부끄럽게도 동네책방을 자주 찾지 않았던 나로서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책방과 일면식 없는 주인장을 만나는 일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약속 시간보다 서너시간 일찍 가서 동네를 걸었다. 동네의 산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거나 호수 주변을 걷기도 하고 집집마다 심긴 나무와 꽃을 살피며 길목을 익힌 후 책방 앞에 섰다. 그러면 왠지 책방이 자주 왔던 곳처럼 낯설지 않았다. 설레는 맘으로 조용히 책방에 들어서면 소란스럽지 않게 주인장과 인사만 나눈 후 책들을 살폈다.

나에게 익숙한 책보다 새로운 책이 훨씬 많았다.

책방마다 얼굴을 내밀고 있는 책과 진열 방식도 달랐다.

책방의 주인장이 다르듯 그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진열한 책이 다른 건 당연할 터인데도 신기하기만 했다.

 

책방을 순례하는 동안 나는 거대한 도서관이나 베스트셀러 위주의 대형서점 진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랑스러운 책들을 참 많이도 만났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 예술과 풍경, 얼음 속을 걷다, 초록의 집, 밥꽃 마중, 무화과와 리슬링,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 아가트, Driver,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멸종,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자발적 가난, 달걀과 닭, 여왕의 변신

고요히 빛나는 이런 사랑스러운 책들을 찾아내는 주인장들의 끈질긴 열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책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삶에서 나온 것이리라.

책을 살피는 동안 주인장은 차를 내오고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몇몇 대표와 이야기 나눌 때만 해도 나의 질문은 다분히 일차원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한적한 동네 뒷골목에서, 사람도 많지 않은 시골에서 오랜 세월 책방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인지.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런 질문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인장들의 셈법은 달랐다.

직접 만든 빵과 커피를 팔기도 하고 자연식 식당을 겸하기도 하고, 번역을 하고 글을 쓰고 강연도 하면서 책방의 적자를 메꿔나가다, 어느 달 집세를 내고 쥐꼬리만한 흑자가 나면 단골손님들을 불러 신나게 회식을 하는 셈법 말이다.

동네책방에서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흑자가 난 달 단골손님들과 회식을 했다는 그 주인장은 브라질 문학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매달 북토크나 강연을 두번 정도는 진행하고, 한달에 한번 동네 사람들과 석성산에 모여 쓰레기를 주우며 조깅하는 줍깅산행도 해요. 그림책 모임, 시 창작회, 생태서적 읽기 모임, 우쿨렐레 강습, 소설 읽기 모임, 온라인 시 필사 모임, 온라인으로 맥주를 마시며 재즈를 듣는 맥즈클럽까지. 그런데 큰일이에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거든요. 보사노바로 배우는 포르투갈어 수업도 하고 싶고, 파울루 코엘류 원서 읽기, 남미 음악기행도 하고 싶고, 지금은 한의사 지인과 동네책방 한방 진료 행사도 기획 중이랍니다.”

동네책방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동네사람들을 부르는 곳이다.

지역공동체 문화가 싹트는 곳이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책방에서 나눈 책의 메시지는 그네들의 삶 속에서 확장되고 퍼져나간다. 책방 없는 동네는 그래서 삭막하다. 동네책방의 대표들은 책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하는 진정한 투사들이다.

봄에 시작해서 여름까지 이어졌던 나의 동네책방 순례는 부산의 책과아이들을 끝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그날도 비는 어김없이 쏟아졌다. 늦은 밤 집에 도착한 나는 <무정에세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밑줄 친 부분의 그 허공은 더 이상 실존의 그늘이 아니었다. 벽 뒤의 허공은 텅 빈 공중이 아니라,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채워나가고 있는, 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일산의 동네책방 주인장은 내일 아침이면 다시 눈을 반짝이며 책 속의 한 문장에서 힘을 얻고, 독자들과 만날 일을 궁리하느라 서점 안에 만들어진 골목길 사랑방을 분주히 오갈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이 쏟아진다.

돈 이야기보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바코드나 키오스크가 아닌, 책을 좋아하는 진짜 사람을 만나면서 사는 나를 보고 싶다는 어느 동네책방 주인장의 소망처럼, 동네책방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대통령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