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주상태
하필이면 터미널이다
고속으로 간다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광주로 갈 수도 있고
부산으로
강릉으로 갈 수도 있는데
서울에 살기에
지하철 교대역에 내려야 2호선을 탈 수 있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려야 7호선을 탈 수 있고
9호선도 탈 수 있다
9호선을 타고 가는 길은
우리집에서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동작역에 내려야 4호선을 탈 수 있는데
가끔이다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2호선을 기다리고
교대역에 내려 3호선을 기다린다
고속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무의식을 만나
삶을 내팽겨 친다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이수역에 가고
이수역에선 4호선으로 갈 수 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마음먹고 한 정거장만 더 가서
갈아타는 삶을 살 수만 있으면
천국보다 낫다는 지상에서 살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는
장님보다 낫다는 세상에서는
가끔 느리게 걷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트를 뛰어가지 않는다
뛰어가면 위험하다는 에스컬레이트를
먼 산을 바라보며
앞 서 가는 사람을 찾아보지 않으며
한 숨 몰아쉬지 않으며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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