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37

나의 나타샤 이야기

나의 나타샤 이야기입력 : 2024.06.13 20:50 수정 : 2024.06.13. 20:53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쟁반 같은 어깨 위로 빼꼼하게 솟아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최근 있었다. 사람의 생각이 언어의 지평 위로 드러난 것이라면 얼굴은 몸에서 가장 전위적으로 표현된 부분이겠다. 저 얼굴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익명의 섬을 떠도는 안개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오래전,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의 사할린 꽃산행에 참가했을 때의 이야기. 현관부터 시작해서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출국심사대에 섰다. 심사관은 여권 사진과 실제 얼굴을 이모저모 대조하였다. 그즈음 누가 급격히 휩쓸고 간 내 마음의 주소를 몇 년 전의 모습에서 찾기가 어려웠던가. 사할린에서 먼저 마주한 건 텁텁한 공기와 낯선 문..

칼럼읽다 2024.06.15

평범한 악인

평범한 악인입력 : 2024.06.12 20:32 수정 : 2024.06.12. 20:33 홍경한 미술평론가  묵직한 파장을 일으키는 영화가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유대계 영국인 조너선 글레이저가 감독·각본을 맡았다. 10여년 전 한국에도 출판된 런던 필즈(London Fields)>의 저자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의 주인공 루돌프 회스는 나치 장교다. 아내 헤트비히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 사택에 거주한다. 이들의 집에는 아름답게 꾸민 정원과 온실, 수영장까지 딸려 있다. 그들 스스로 ‘낙원’이라 부르는 그곳에서 지인들과 평화롭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파티를 연다. 사택 맞은편 수용소는 죽음의 공간이다. 유대..

칼럼읽다 2024.06.13

밤에 하는 산책

밤에 하는 산책입력 : 2024.06.11 20:47 수정 : 2024.06.11. 20:48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밤에 하는 산책’이다. 거주지가 학교 근방이라 보통 퇴근 후 교정이나 교내 원형운동장을 슬렁슬렁 걷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해넘이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닌다. 목적지 없이 걷다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섰던 밤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자동차 클랙슨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건물 처마 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 냄새와 알감자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옛날식 가스레인..

칼럼읽다 2024.06.12

‘눈코 뜰 새 없다’니…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

‘눈코 뜰 새 없다’니…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수정 2024-06-06 18:44 등록 2024-06-06 14:30  바쁘면, 돌아보고 둘러보고 넓게 보고 멀리 볼 수 없다. 그저 여기저기에 매달려 살 뿐. 요즘 내가 딱 그 짝이다. 여유 있게 굽은 골목길로 발을 들여놓지도,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처량하게 쳐다보지도, 사람을 정성껏 대하지도 못한다. 할 일의 가짓수는 늘어 가는데, 머리는 더디고 손은 느리고 몸은 굼뜨다. 바쁘다 보니, 만나자는 연락에 ‘눈코 뜰 새 없다’며 거절하기 일쑤. 이 표현과 같은 뜻의 ‘안비막개’(眼鼻莫開, 눈과 코를 뜰 수 없다)라는 한자어도 있는 걸 보면, 옛사람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 국수에는 젓가락이, 팥죽에는 숟가락이..

연재칼럼 2024.06.11

노스님과 가야산

노스님과 가야산입력 : 2024.06.06 20:46 수정 : 2024.06.06. 20:49 보일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누구에게나 스승은 있다. 그 스승은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 혹은 가족 구성원일 수도 있다. 혹자는, 요즘은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필요한 지식이야 유튜브나 인공지능을 통해 언제든지 얻을 수 있고, 지혜를 지닌 본받을 만한 대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멘토’니 ‘구루’니 하는 생경한 단어를 끌어다 자신이 닮고자 하는 모습을 비춰보기도 한다. 하긴 자신의 삶에 영감과 통찰을 줄 수 있다면 이름이 무엇이든 대상이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 어쩌면 스승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에게 스..

칼럼읽다 2024.06.10

책을 읽다가 [서울 말고]

책을 읽다가 [서울 말고]수정 2024-06-02 19:18등록 2024-06-02 19:13  게티이미지뱅크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비울 때면 까치발을 들고 부모님의 책장을 구경했다. 한자가 많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사진이 많아 읽기 좋은 잡지, 손때 묻은 소설책을 뒤적이다 보면 가끔 부모님이 선물 받은 것 같은 낡은 책들도 만났다. 그런 책의 첫 장엔 꼭 어른스러운 글씨로 새겨진 짧은 문장이 있었다.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천구백팔십몇년 모월 모일. 그런 글씨를 볼 때면 내가 모르는 시절의 부모님에게 누군가 건넸을 어떤 단정한 마음에 대해 상상했다. 쑥스럽지만 손글씨가 새겨진 책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선물 같다고 믿던 시절도 있었다. 그 무렵 누구에게, ..

책이야기 2024.06.09

‘창가의 토토’에게 배운 자유

‘창가의 토토’에게 배운 자유입력 : 2024.06.06 20:46 수정 : 2024.06.06. 20:49 김봉석 문화평론가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 소설을 각색한 애니메이션 창가의 토토>.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는 영화를 보러 간다. 문화의날이라 영화 관람료가 절반이다. 하루 중에 할인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일정을 맞춰 보러 간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관람료가 1만5000원까지 올랐기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영화나 보러 갈까라는 선택은 사라졌다.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은지, 몇번이나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한다. 5월의 마지막 수요일, 집에서 가까운 극장의 상영표를 살펴봤다. 시간대로 훑어내리다, 창가의 토토>를 발견했다. 내가 아는 창가의 토토> 맞나? 개봉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

책이야기 2024.06.08

뒷모습과 화양연화

뒷모습과 화양연화입력 : 2024.06.06 20:47 수정 : 2024.06.06. 20:49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나이 사십이면 본인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몸을 대표하는 그것을 문지르고 닦지만, 그것만으로 얼굴은 관리되는 게 아니다. 세월이 와서 주무르는 데 피할 방법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저 말은 살아간다는 것의 단정함과 엄숙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보다 더 서늘한 말도 있다.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뒷모습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광명한 세상에 유일한 맹점이 있다면 그건 본인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종내에는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운명인가 보다. 누구나..

칼럼읽다 2024.06.07

로컬 부자 선언

로컬 부자 선언입력 : 2024.06.05 20:40 수정 : 2024.06.05. 20:41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최근 유튜브에서 서비스되는 맛집 탐방 콘텐츠 또간집>을 꼬박 챙겨본다. 거침없는 캐릭터의 진행자가 쏟아내는 입담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격한 반응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온라인상에 차고 넘치는 맛집 탐방 콘텐츠 가운데 내가 유독 또간집>에 호감을 느낀 이유가 영상 자체의 재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몇편을 연이어 보면서 알아챘다. 진행자는 예고 없이 한 지역으로 나선다. 길에서 즉흥적으로 인터뷰를 시도한다. 맛있어서 최소 두 번 이상 가본 맛집을 추천받는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영수증으로 가늠한다. 영상 끝에 그날 추천받아 방문한 서너 곳 가운데 ‘또 갈 집..

칼럼읽다 2024.06.06

낭만이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낭만이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입력 : 2024.06.04 20:24 수정 : 2024.06.04. 20:25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낭만이 떠난 지도 오래되었다. 격정도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비가 와도,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을 찾지 않는다. 낭만은 어디로 떠났을까? 여러 해명이 가능하다. ‘먹고사니즘’ 탓일 수도 있고 ‘귀차니즘’ 탓일 수도 있다. 혹자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견디며 하루를 버티고 삶을 이어가고, 혹자는 ‘소확행’의 즐거움으로 하루를 꾸미며 인생을 장식한다. 소위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이게 낭만이 사라진 시대의 풍경일 것이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허전한 시대 풍조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전혀 다..

칼럼읽다 202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