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58

나는 노들의 학생이다

나는 노들의 학생이다 입력 : 2023.10.19. 20:26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지난 금요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노들장애인야학(노들)에 다니는 학생들의 무상급식을 위한 후원 행사가 열렸다. 우리는 이 행사를 ‘평등한 밥상’이라고 부른다. 정부가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해주면 좋겠지만 노들은 정규학교가 아니어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노들은 정규학교가 장애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학교다. 정규학교에서 배제해놓고, 정규학교가 아닌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급식에서 배제하는 셈이다. ‘평등한 밥상’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기울어진 밥상을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매년 이맘때면 교사들 모두가 후원 티켓 판매에 나선다. 나..

칼럼읽다 2023.10.20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 (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한 일이지만,..

연재칼럼 2023.10.20

[말글살이] 부사, 문득

[말글살이] 부사, 문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부사(副詞)는 이름부터 딸린 식구 같다. 뒷말을 꾸며주니 부차적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더부살이 신세. 같은 뜻인 ‘어찌씨’는 이 품사가 맡은 의미를 흐릿하게 담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 모든(!) 글쓰기 책엔 부사를 쓰지 말라거나 남발하지 말라고 한다. 좋은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동사)로만 되어 있다는 것. 부사는 글쓴이의 감정이 구질구질하게 묻어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하면서도 마치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단다. (그러고 보니 이 칼럼의 분량을 맞출 때 가장 먼저 제거하는 것도 부사군.) 그래도 나는 부사가 좋다. 개중에 ‘문득’을 좋아한다. 비슷한 말로 ‘퍼뜩’이 있지만, 이..

연재칼럼 2023.10.20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니......

어제다. 인사동에 있는 대학졸업전을 갔다. 근데. 전시를 다 보고 나와서 방명록을 쓰는데, 무료 음료 쿠폰을 주었다. 이런 일이. 전시를 봐서 고마운데, 무료 음료까지. 갤러리 위 카페에 올라가서 오렌지 쥬스를 주문했고 베란다에 가서 소설을 읽었다. 수요일 한낮에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다니. 사실 이번에 카페에서 책을 처음 읽었다. 도서관 아니면 집인데...... 쥬스를 받으니, 그냥 오늘 산 책을 읽고 싶어져서다. 어제 본 대학졸업전은 못 잊을 것 같다. 단지 음료때문만은 아니다. 마음, 그것 때문이라고? 2023. 10. 19

하루하루 2023.10.19

실패의 자랑

실패의 자랑 입력 : 2023.10.19 18:31 수정 : 2023.10.19. 20:32 이명희 논설위원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실패연구소에 제출된 ‘일상에서 포착한 실패의 순간들 사진전’ 전시 작품. 카이스트 제공 아이슬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소득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도 아니고,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닌데 무엇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 에릭 와이너의 책 는 아이슬란드에서 찾은 행복의 이유로 실패에 관대하다는 점을 꼽았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에는 유독 예술가와 작가가 많다고 한다. 이들에게 작가로 성공했는지 아닌지, 책을 출판한 적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책에서 아이슬란드인은 말한다. “우리는 누구보다 착하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을..

칼럼읽다 2023.10.19

슬픔의 총량

슬픔의 총량 입력 : 2023.10.11. 20:51 노승영 번역가 남쪽 하늘 천칭자리의 글리제 581 항성을 공전하는 글리제 581d 행성에서 피지배 종족인 글리제 581d-Ⅱ족이 봉기를 일으켜 글리제 581d-I족 아녀자를 인질로 잡고 대치 중이다. 한편 직녀성이 있는 거문고자리에서는 케플러 438 항성을 공전하는 케플러 438b 행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케플러 438b-IV족 수천 명이 사망하고 지금도 수만 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성에서 수많은 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고 그 뉴스가 보이저 34호 탐사선을 통해 인류에게 실시간으로 보도된다. ‘공감의 원’은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자신만 아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던 우리는 개인의..

칼럼읽다 2023.10.15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

연재칼럼 2023.10.14

창피한 가난? '현피' 떠보면 달라진다는 언니

창피한 가난? '현피' 떠보면 달라진다는 언니 구술생애사 최현숙, 23.10.12 11:58l최종 업데이트 23.10.12 13:21l 글: 최문희(moonf69)그래픽: 고정미(yeandu)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싸움에서 용감하게 활약하여 공을 세운 이야기들 천지였다. 이른바 무용담을 말하는 주변 사람들. 부모님이든 이웃 어르신이든 상급자든, '그리하여 오늘날 내가 떳떳하게 살아간다' 하고 털어놓는 인생 드라마를 듣다보면 기가 빨렸다. 딴생각할 재간도 없는 목석같은 성향 탓에 타인의 굿판 같은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시시때때로 궁금해졌다. '..

책이야기 2023.10.13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입력 : 2023.10.11 20:48 수정 : 2023.10.11. 20:50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어린 시절 제비는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놀다 보면 제비가 낮게 날 때가 있었다. 비가 올지 모르니 빨리 집에 가라는 동네 어른 말씀에 뜀박질을 시작하면 정말로 곧 소나기가 쏟아지고는 했다. 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것은 오랫동안 누적된 경험으로 우리 선조가 파악한 상관관계다. 하지만 새가 낮게 날기 ‘때문에’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상관관계가 사실이라고 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인 인과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노벨상 수상자 숫자와 초콜릿 소비량 사이에 상당히 강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이것도 인..

칼럼읽다 2023.10.13

발과 손, 그 쓰임에 관하여

발과 손, 그 쓰임에 관하여 입력 : 2023.10.12 20:21 수정 : 2023.10.12. 20:23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추석 지나고 가을이 왔다. 어느새 발밑에 깔리는 바싹 마른 낙엽들. 어디선가 주춤주춤 나타나서 해자(垓子)처럼 둘레를 친다. 추석, 가을, 낙엽. 이 말속에 최근의 내 감각은 한 소쿠리씩 담긴다. 자연이 있고 이에 따라 언어가 발명되었겠지만, 이젠 저 말의 봉지를 따 그 진한 냄새를 흡입하고서야 이 계절 안에 제대로 풍덩 잠긴다. 알록달록한 단어들이 아니었다면 시월의 이 느낌, 이 기분과 어떻게 밀착하랴. 그런 생각의 와중에 마침 우리의 한글날은 있다. 반짝이는 하루를 지나면서 두툼한 국어사전을 부러 쓰다듬어 본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질서 있게 배열된 낱말마다 품사도 정확히 ..

칼럼읽다 202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