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58

배려와 배제 사이

배려와 배제 사이 입력 : 2023.10.09 20:25 수정 : 2023.10.09. 20:26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비 오는 날, 남대문이 있는 회현역에서 서울시청역까지 걸었다. 빗물에 쓸려 넘어질까 위태로운 내 처지를 닮은 목발의 고삐를 쥐는 것만으로 양손이 꽉 찼다. 어느 신호등 앞에 선 순간, 목발과 나의 처절한 관계를 비집고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까지 가세요? 우산 씌워드릴까요?” 민폐일까 죄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상대는 용기 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신호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그 횡단보도 앞에 녹색불이 켜지는 순간까지 함께 머물렀고, 이내 그는 나와 방향이 맞지 않아 각자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흩어졌다. 헤어진 뒤로 잠깐 비를 더 맞기는 했지만, 우산 그늘 ..

칼럼읽다 2023.10.10

판단력과 분별력

판단력과 분별력 입력 : 2022.11.01 03:00 수정 : 2022.11.01. 03:02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 현대인들에게 판단력과 분별력은 개개인의 행복 지수, 건강(수명), 경제 상황 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사회 전체의 안녕과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 사람들은 뛰어나다”라고 한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을 되게 하는 능력, 가시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또는 승부에서 이기는) 능력, 뛰어난 예술적 창의성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대해서조차도 합리적인 판단이나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판단과 분별은 의미가 살짝 다르다. 분별은..

칼럼읽다 2023.10.10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역사·현실 의식 강한 시인이었죠”

“‘목마와 숙녀’ 박인환은 역사·현실 의식 강한 시인이었죠” [짬] 박인환 전집 5권 완간 안양대 맹문재 교수 안양대 국문과 교수인 맹문재(60·사진) 시인은 이른바 참여시인이다. 그는 20대 후반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기 앞서 포스코에서 7년 동안 철판을 옮기고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노동을 했다. 1991년 시인으로 등단해 전태일문학상(1993)과 윤상원문학상(1996)을 받았다. 농부이자 광부의 아들인 그는 3년 전에는 광산촌을 다룬 시를 한데 모아 사북항쟁 40주년 기념시집 ‘사북 골목에서’를 펴냈다. 그가 간행을 주도하는 ‘푸른사상 시선’은 그간 181권을 냈는데 선정 시인 다수가 노동자이다. 2019년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을 이끌어 그간 220여명 회원과 친일문학상 폐지운동도 해왔다. 한국작가회..

책이야기 2023.10.09

한글날, 우리말의 위기

한글날, 우리말의 위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공상과학(SF) 소설이 대세다. 화제작이 많아 연휴 중 몇편 읽었다. 참신한 상상력과 뚜렷한 주제의식, 탄탄한 스토리는 물론 소수자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따뜻한 시선까지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맞서 싸우거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던진 뒤로 우리 소설이 얼마나 다채롭고 생생해졌는지 새삼 놀랐다. 역설적이지만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문학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 같기도 하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창작인데도 문장이 번역문처럼 읽혔다. 요구된다, 포함된다, 해당된다, 제공된다, 가족 구성원 등은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억지스럽게 옮겨졌거나 불필요하게 끼어든 표현이 굳어진 것이다. 문장 구조도 그렇다. 영어의 ‘물주구문’을 ..

책이야기 2023.10.09

'내 글' 공개 후 힘들어진 글쓰기, 이유 생각해보니...

'내 글' 공개 후 힘들어진 글쓰기, 이유 생각해보니... 책 찬찬히 읽으며 이유를 찾았다... '나도 이런 문장을 써보고 싶다' 23.10.08 14:16l최종 업데이트 23.10.08 14:16l 권진현(qkfl02) 글쓰기가 생경해졌다. 공개적인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매일 쓰는 것도 가능했다. 요즘은 글을 통 못 쓰고 있다. 매체에 송고하는 기준으로 월 1~2개의 글을 쓰기도 버겁다. 고민과 퇴고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글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처음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 일쑤다. 글쓰기가 힘든 이유 ▲ 좋아했던 글쓰기가 힘들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 픽사베이 아이들을 재운 뒤에야 내 시간이 주어진다. 적게는 1시간, 많게는 2시간 정도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글쓰기에 올인한다고 하더라도 1..

책이야기 2023.10.09

우리에겐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입력 : 2023.10.04 20:38 수정 : 2023.10.04. 20:39 오은 시인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한가위 연휴가 겹쳐 많은 이들이 따로 또 함께 시청했을 것이다. 연휴의 어느 날 찾았던 식당에서도 아시안게임이 중계되고 있었다. 셔틀콕이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어가고 축구공이 시원하게 잔디밭을 가를 때 입이 떡 벌어졌다. 먹기 위해서 벌린 입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이다. 각자의 탁자를 앞에 둔 채,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화면으로 쏠려 있다. 탄성이 터질 때 감탄과 탄식이 자리를 뒤바꾸는 건 예사다. 승패가 결정되면 사람들은 다시 탁자 위로 고개를 수그린다. 승부가 나는 것도 아닌데 일제히 손이 바빠진다. 경기에 이긴 선수의 탁월..

책이야기 2023.10.08

범상치 않은 친일파,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문인

범상치 않은 친일파,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문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용제 세종대왕은 서문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다. 이 나랏말쌈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당연히 달랐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했다. 그들의 용어로 하면 '국어 상용화' 정책을 강제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말과 글을 억압한 1차적 의도는 징병제에 있었다. 한국인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면 한국어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2019년에 제83집에 수록된 송숙정 중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본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국어 상용화 정책에 관한 일고찰'에 조선총독부의 1942년 자료인 가 인용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징병제 실시 계획이 발표된 1942년에 한국인 징병 적령자 21..

책이야기 2023.10.08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입력 : 2023.06.22 03:00 수정 : 2023.06.22. 09:38 인아영 문학평론가 당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할리우드 배우들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좌담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연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연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연기가 아니었다면 체포되었을 만한 행동을 해볼 수 있거든요. 솔직하고 재치 있지만 익숙한 답변이 이어지는 와중에 순서를 기다리던 짐 캐리의 대답은 현장의 공기를 단숨에 바꾼다. “저는 부서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I act because I’m broken).”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다. “저는 수많은 조각들로 부서진 사람이고, 연기는 수많은 조각들..

책이야기 2023.10.08

비행기에서 삶을 묻다

비행기에서 삶을 묻다 입력 : 2023.09.17. 20:32 오찬호 저자 제주에 살면서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다. 할 줄 아는 게 기록이라, 몇 년간 차곡차곡 쓸데없는 것들을 모았다. 출발·도착 예정시간과 실제시간, 지연 횟수와 이유, 비행기 내부에서 본 것들 등등. 국내선에 국한된 개인 경험이지만 데이터를 누적하니,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삶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도 느껴지고, 아기자기한 세상 이치도 어렴풋이 보인다. 놀라지 마시라. 비행기가 탑승권에 적혀 있는 시간에 이륙할 확률은 1% 미만이다. 제때 입장이 시작되어도, 이런저런 짐을 든 150~180여명을 20분 만에 태우는 건 어렵다. 일부러 가장 먼저 탑승해 기록을 해보니 출입문 닫힐 때까지가 평균 24분, 이륙까지는 35분이 걸렸다. 모든 게 순조..

칼럼읽다 2023.10.07

나폴리처럼

나폴리처럼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얼마 전 유럽의회는 스마트폰에 탈부착 가능한 배터리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몇년 안에 유럽에서는 소비자가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는 스마트폰만 판매될 예정이다. ‘수리할 권리’를 법제화한 것이다. 그동안 소비자들은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기능상 아무 문제 없던 스마트폰을 새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멀쩡하게 잘 쓰던 제품이 보증기간이 지나자마자 이런저런 고장을 일으키는 기이한 현상 말이다. 오늘날 많은 기업은 부러 내구성이나 기능을 제한해 출시한다. 그래야 새 제품을 사니 의도적으로 제품 수명을 줄인다. 바로 ‘계획적 진부화’다. 기업들은 물건을 팔아먹을 때는 완전무결한 물건이라고 과시하다 의도적으로 수명을..

칼럼읽다 2023.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