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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없는 도서관 [크리틱]

벽이 없는 도서관 [크리틱] 수정 2024-02-21 19:00 등록 2024-02-21 16:26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다. 1911년에 완공돼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돔형 지붕 아래 열람실 한가운데다. 5층 높이 팔각형 돔 천장의 480개 판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 덕에 문명의 빛을 한껏 받는 듯하다. 중앙의 사서용 팔각 책걸상을 중심으로 모서리를 따라 여덟 갈래로 뻗어있는 오크 책상 한곳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자니 근대의 기록자라도 된 듯하다. 지금 여기의 현재성을 실감케 하는 건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다. 각국의 언어도 주변에서 소곤거린다. 랜드마크인 이 도서관은 멜버른의 가볼 만한 여행지로도 첫손에 꼽힌다..

책이야기 2024.02.23

하늘이 만든 영상

하늘이 만든 영상 입력 : 2024.02.20 20:07 수정 : 2024.02.20. 20:09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 은 독특한 서사 구조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장르를 넘어서는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모로 당시 한국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명작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몰입을 방해한 요인은 괴물의 움직임이 보이는 약간의 어색함이었다. 한국 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제작비와 공력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일 만큼 박진감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기술과 자본이 집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픈AI가 며칠 전 공개한 영상이 또 한 번 세계를 흔들고 있다. 촬영이나 편집에 인간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고도 텍스트를 영상으로 ..

칼럼읽다 2024.02.23

‘끌어내다’ 그 말을 즐기는 자는… [말글살이]

‘끌어내다’ 그 말을 즐기는 자는… [말글살이] 수정 2024-02-22 18:43등록 2024-02-22 14:30 다리를 다치면 목발을 짚듯이, 말도 뜻이 불분명하면 필요 없는 말을 덧대어 뜻을 선명하게 만든다. 단어 ‘드나들다’를 보면 ‘들다’와 ‘나다’가 합쳐져 ‘드나(들나)’가 만들어졌지만, 뜻이 불분명하여 뒤에 ‘들다’를 한번 더 썼다(‘나들이’는 한번씩만 썼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말에서 보듯이, 경계 밖으로 나가는 걸 ‘나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들다’라고 한다. 하지만 두 단어는 다른 뜻도 많아서 안이나 밖으로 움직인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려면 ‘나오다, 나가다, 들어오다, 들어가다’처럼 뒤에 ‘오다, 가다’를 붙여줘야 한다 (요즘엔 ‘안으로 들라!’보다 ‘..

연재칼럼 2024.02.23

장대비가 쏟아지면

장대비가 쏟아지면 주상태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음악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호우특보 강풍경보도 안타깝지만 나를 울리는 것은 지붕을 때리는 따가움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 공휴일이면 으레 보는 특선영화 같은 것 경기북부 파주에서 전해오는 침수피해는 기어이 뉴스거리로 다가오고 만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뉴스거리로 남는 것 한동안 살았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같은 것 의미있는 일이란 비가 내리고 거칠게 다가와 음악이 된다는 것 도시에서 마비되어버린 감성이 길 잘못 찾은 내비게이션처럼 가는 길은 그곳인 줄 알고 뇌비게이션보다 낫다고 여기는 슬픔 몸마저 술을 이기지 못하면 가지런히 놓인 진열장 상품처럼 팔리지 않는 몸을 누이고 기다릴 뿐 이미 팔린 줄도 모르고 아직 팔리지 않은 줄 알면서도 반복하고 반복하다 생을 마..

시를쓰다 2024.02.23

이강인-손흥민 사태의 진상과 허상

이강인-손흥민 사태의 진상과 허상 기자 김창금 수정 2024-02-21 00:20등록 2024-02-20 18:18 한국 축구대표팀의 핵심인 이강인과 손흥민의 다툼을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높다. 하지만 미디어의 취재력과 시선은 제한돼 있고, 팬들도 진상을 몰라 답답해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검색 도구인 빅카인즈를 통해 ‘이강인’과 ‘손흥민’ 키워드를 입력하면 지난 일주일간 신문·방송 등에서 1069개의 기사가 검출된다. 기사의 연관어를 보면 둘의 소속 팀인 생제르맹과 토트넘이 두드러지지만, ‘주먹질’ ‘몸싸움’ ‘악플’도 검색된다. 선수 생명과 직결된 주먹질이나 몸싸움 이슈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미디어는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고, 선수마다 말이 달..

칼럼읽다 2024.02.21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죄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죄 입력 : 2024.02.20 20:11 수정 : 2024.02.20. 20:13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대위 볼코노고프는 어느 아침 출근길에 직속상관의 투신을 목격한다. 참모 회의가 취소되고 부서 동료가 하나둘씩 재심사로 불려들어가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피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8년의 스탈린 정권하에서 이는 내부숙청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직전 볼코노고프는 탈출을 감행한다. 그날 밤 노숙인 무리에 섞여 있던 그는 처형당한 이들을 파묻는 노역에 동원되고, 불과 아침까지도 함께 농담을 주고받던 가까운 동료의 시신을 거기서 본다. 동료의 유령은 흙더미를 헤치고 나와 말을 건넨다. 내용인즉슨 ..

칼럼읽다 2024.02.21

주부 날다

주부 날다 주상태 노랫소리 높이지 않고도 빨래를 널고 음악 틀지 않아도 설거지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얼추 주부가 되었나 보다 일상이 때로는 사람을 키우는 법 목욕을 하다 가도 욕조를 닦고 이빨을 닦다 가도 세면대를 닦는 것은 주부가 아닌 듯 일상이 사람을 죽이는 법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하여 전자렌지의 속을 마음 청소하듯 칫솔로 문지르고 싱크대 오물을 내장 긁어내듯 정성스레 냄새를 감수한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가정을 알게 된다는 것 살림을 한다는 것은 삶을 가꾸는 일 고무장갑이 손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오늘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주부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한 연습 같은 것 꿈을 꾸지 않아도 가슴 뭉클해지는 사랑 같은 것 나는 오늘도 손빨래를 한다

시를쓰다 2024.02.21

삶은 찰나의 것

삶은 찰나의 것 입력 : 2024.02.14 20:26 수정 : 2024.02.14 20:27고영직 문학평론가 문화적 보릿고개를 맞아 몇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민환기 감독의 다큐영화 (2024)을 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향한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 5·18 이후 옥중의 김대중에게 당시 안기부가 미국행을 회유하는 희귀 영상자료 등이 퍽 인상적이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2024)를 보며 누군가에게 ‘곁’을 내준다는 일이 생각 외로 힘이 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대, 저항, 용기’를 강조하는 80대 켄 로치 감독의 앵글에서 짙은 허무의 감정 같은 게 느껴지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의 (2023)을 관람했다. 1..

칼럼읽다 2024.02.20

입은 작은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입은 작은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입력 : 2024.02.15 20:23 수정 : 2024.02.15. 20:24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몸은 장독대이다(, 진옥섭). 심장, 간장, 비장, 폐장, 신장, 소장, 대장 등의 장기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항아리 쉽게 깨지듯 한마디 말에 얼마나 상처 입는 마음인가. 그러니 저 ‘장’자 돌림의 오장육부를 안고 있는 사람의 몸을 장독대라 표현한 건 참으로 절묘하다. 얼굴은 ‘얼의 굴’이다(다석 유영모). 굴은 좁아서 한 글자씩 겨우 산다. 눈, 코, 귀, 뺨, 턱, 입. 이런저런 꼬리 없이 단정한 한 세계들. 그래서 힘이 더욱 세다. 입을 드나드는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혀, 이, 밥, 국, 찬, 물, 술, 숨 그리고 말. 식물은 입이 없..

칼럼읽다 2024.02.20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주상태 나의 잘못은 너무 빨리 일어선 것이다 바람 불 때 빨리 쓰러지고 엎드려 있던 그대로 버티지 못하고 꿈틀거리다 뻗지도 못하면서 일어서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서는 것 바람 불어오는 곳에서 태어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삶이라면 비바람을 이기는 연습으로 바람으로 버텨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살아야 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살지 못하고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다 산다는 것마저 놓치고 그래도 축복은 바람이 불어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쓰러질 수 있다는 것 너무 빨리 일어서지도 말며 너무 빨리 쓰러지지도 말아 2012. 10. 14

시를쓰다 2024.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