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 79

노년의 길목에서

노년의 길목에서 젊은 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조금씩 주저앉아온 삶이라고 해서,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로는 이제는 세상일 좀 잊고 살아야겠다고 공언해보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잠시 눈을 감아볼 수는 있겠지만 남은 생 전부를 눈 감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이 세상과 타협하며 추하게 늙고 싶지도, 세상이 추하다고 혼자서만 곱게 늙고 싶지도 않다. 수정 2024-02-15 20:40등록 2024-02-15 18:47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지난 14일 마지막 급여를 수령했고 15일에는 19년 동안 지켜왔던 연구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책들과 책장, 책상과 의자, 그리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 등 연구실 살림들을 모두 치우는..

칼럼읽다 2024.02.16

아프다는 것에 대하여

아프다는 것에 대하여 주상태 손가락 관절이 아리다 손가락 꺾기를 거듭하면서 뼈와 살의 경계를 생각한다 뼈만 남아있는 앙상한 모습과 살의 효용을 고민하다보면 내 몸은 해체된다 산산조각으로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난다 내가 아프면 몸이 아픈 것이고 내가 아파하면 마음도 아플 것이다 피가 흐르지 않는 세상에서는 살을 에는 아픔도 느낄 수가 없지만 머리를 흔들다 잠을 설친다 맑은 하늘을 꿈꾸며 기어코 눈을 뜬다 삶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를 불러낸 것이다 희망의 바람이 분다고 저주의 비가 내린다고 함박눈이 쏟아진다고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관절이 먼저 알아 차리지만 일어설 기운은 없다 바람이 불지만 달려야 할 때가 있다고 비가 올 것 같지만 달려야 할 때가 있다고 우기고 우기면서 나에게 말한다 깨어나..

시를쓰다 2024.02.16

조금 기다려도 괜찮으실까요?

조금 기다려도 괜찮으실까요? 어차피 혼잔데 수정 2024-02-15 08:11 등록 2024-02-15 08:00 이명석│문화비평가 작은 파티를 연 주인이 못마땅한 듯 플라스틱 탁자를 툭툭 쳤다. “큰 맘 먹고 주문한 테이블이 있는데, 세관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네요.” 내가 말했다. “요즘이 그럴 때죠.” 연말연시부터 설날연휴까지, 소중한 사람 혹은 스스로를 위한 선물 상자들이 공항과 항구 세관에 긴 줄을 지어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시즌이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이유로 관세청 앱을 수시로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언젠간 오겠죠. 기다리는 것도 재미예요.” 주인의 말에 같이 빙긋이 웃었다. 며칠 뒤 동네를 걷는데, 평소 긴 줄이 당연하던 유명 식당 앞이 한산했다. 줄서기를 워낙 싫어하는 나였지만 꼬리에 붙어보기..

칼럼읽다 2024.02.15

술배를 타고

술배를 타고 주상태 술배를 타고 친구 만나러 간다 일이 아니라 술이 고파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즐거울 때 명동에서 등갈비도 먹고 흑석동에서 생삼겹살도 구워 먹고 홍대 골목길에서 막걸리도 넘기고 시청이 보이는 곳에서 맥주도 마신다 술배와 친구가 정비례하는 것이 두렵지 않을 때 삶은 가까이 있고 꿈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꺾어지는 나이가 힘들었던 사람은 안다 고비고비 함께 탔던 배가 차고 넘칠지라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술잔을 마주하는 날 잔에 술이 출렁대는 시간 말이 늘어나고 친구가 많아지고 살이 불어가지만 절대로 긴장하지는 말 것 어차피 술이 배로 가던 배가 술로 가던 노 저어 강을 건너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기에 넓은 강은 넓은 대로 좁은 강은 좁은 대로 좋은 세상 보고 싶으면 ..

시를쓰다 2024.02.15

말이 아니라 사람을 뽑으니까

말이 아니라 사람을 뽑으니까 입력 : 2024.02.13 20:06 수정 : 2024.02.13. 20:07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말의 힘은 이중적이다. 말은 사실과 진실을 전하지만, 가짜와 거짓을 퍼뜨리는 데에도 능숙하다. 그래서 말은 종종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처칠의 말이다. “진실이 바지를 입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세상의 절반을 돌고 있다.” 즉각성, 전체성, 광속성을 추구하는 디지털 문명이 기술적으로 이를 거들기에 더욱 실감나는 말이다. 말의 전쟁인 선거가 시작되었다. 진실이 양말을 신기도 전에 거짓은 이미 온 동네를 몇 바퀴는 돌고 있다. 속도의 경쟁력에서 진실은 거짓을 이길 수 없다. 통상적으로 말의 전쟁이 끝난 뒤에 진실은 거짓을 간혹 이기곤 한다. 하지만 대개는 회복하기 힘든 ..

칼럼읽다 2024.02.14

너를 부른다

너를 부른다 입력 : 2024.01.25 20:06 수정 : 2024.01.25. 20:11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떡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밥 생각이 납니다.” 조선 초량왜관의 근무자, 1719년 조선통신사의 수행자, 그 여정을 함께한 조선 사람 신유한(申維翰·1681~1752)으로부터 ‘일본에서 제일가는 학자’ 소리를 들은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가 엮은 속 한 구절이다. 그의 왜관 생활이 상당히 반영된 이 책의 표제어 ‘떡 병(餠)’에 잇따른 문장이 보신 대로다. 아무렴, 밥 배 따로 별미 배 따로지. 아, 배불러! 해도 ‘디저트’를 감지한 배 속은 알아서 과자 집어넣을 자리를 내어준다. 그러고 보니 유만공(柳晩恭·1793~1869)은 설날 손님맞이상을 받은 세배꾼의 모습을..

칼럼읽다 2024.02.14

술 한 잔 건네다

술 한 잔 건네다 주상태 목숨 걸고 마시는 것은 아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새로운 친구 맞이하는 것처럼 사람이 술을 부른다 낙엽이 나무의 생존본능이듯이 사람도 감성본능으로 세월의 흔적을 찾아간다 가을비 맞은 잎새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시간 가슴 아리게 다가서는 날 귀가 길 외등이 나를 감싸고 모든 것을 가리고 마는 어둠만이 나의 세상인 듯 호탕한 웃음으로 거친 숨소리로 마음껏 삶의 잔해들을 뱉어낸다 누가 그랬던가 술 한 잔 건네는 사이는 인간 사이라고 차 한 잔 건네는 사이는 친구 사이라고 술을 건네는 시간 삶을 건넌다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를쓰다 2024.02.14

“술 고프다”…‘고프다’의 배신? ‘배’의 가출? [말글살이]

“술 고프다”…‘고프다’의 배신? ‘배’의 가출? [말글살이] 수정 2024-02-08 15:38 등록 2024-02-01 14:30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농담 투로 말하면, 나는 ‘과학자’다(말하고 나니 정말, 가소롭군). 과학자로서 품은 욕심 중 하나는 말뜻이 어디로 튕겨나갈지를 예측하는 것. ‘한치 앞’을 알고 싶어 한달까. 하지만 매번 실패다. 한치 앞의 사람 일도 알 수 없는데, 말의 한치 앞을 알 턱이 없지. 방금까지 좋아 죽던 사람이 세치 혀를 잘못 놀려 일순간 원수가 되듯이, 낱말은 자신이 밟을 경로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변해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알아차릴 뿐이다. ‘고프다’가 대표적이다. ‘배 속이 비어 음식이 먹고 싶다’는 뜻의 이 낱말은..

연재칼럼 2024.02.13

나의 ‘낯선’ 달리기 연습

나의 ‘낯선’ 달리기 연습 입력 : 2024.02.12 20:05 수정 : 2024.02.12. 20:07 심완선 SF평론가 달리기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헬스장보다 야외에서 달리는 쪽이 기분 좋고 체력도 잘 는다는 거였다. 달리기 초심자로서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진 못했다. 밖을 달리다 보면 나와 몸과 세상이 얼마나 서먹한지 절감하게 된다. 바닥은 디딜 때마다 딱딱하게 굳어 나를 밀어낸다. 공기는 날카롭거나 텁텁하다. 내 다리는 의지에 반해 자꾸 땅에 달라붙으려 든다. 애써 팔다리를 통제하고 있으면 사지가 자유롭다는 개념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이상한데? 안 되는데? 물론 배부른 소리다. 하지만 나는 이럴 때나 되어야 ‘오체불만족’ 생각에 빠진다. 몸뚱이가 물리적 실체를 지닌 구속복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칼럼읽다 2024.02.13

순대국밥을 먹으며

순대국밥을 먹으며 주상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올라온 서울 순대국밥은 우리 삶의 체중계였다 한 그릇 말끔히 비웠던 밥이랑 머리고기는 누구의 양식이었고 구석자리는 우리의 차지였다 얼굴 붉히며 조여드는 수치심보다 매일 아침밥을 걱정했기에 순대 국 그리고 밥은 우리에게 따로 다가왔다 10년이 지난 겨울에 IMF도 지나고 미국발 금융위기도 지났지만 여전히 추운 도시는 한 그릇으로도 겨우 버티고 한 그릇으로 한 사람이 버틴다 눈물보다 한숨이 그립고 아픔보다 사랑이 다가오지만 순대국밥은 가끔 먹는다 이제 순대국밥은 내 몸의 체중계가 되었기에

시를쓰다 20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