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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비우며, 퇴직 단상

방을 비우며, 퇴직 단상 입력 : 2024.02.18. 19:50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요즘 학교에 있는 내 방을 비우고 있다. 책을 옮기고, 나누고, 치우니 이달 말에 정년퇴직이라는 걸 실감한다. 삶에 작은 매듭 하나가 더해지고, 이제 나도 노년에 들어섰음을 새삼 깨닫는다.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본다. 돌아보니 강의실 안팎으로 좋은 인연이 많았다. 가톨릭 동아리 학생들, 학내 자치 공간과 대안 문화를 고민했던 생활도서관 ‘단비(일단은 비빌 자리)’와 학교 청소노동자와 연대했던 ‘맑음’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떠오른다. ‘민들레 장학금’과 매 학기 따뜻한 차로 학생들과 함께하던 청소노동자들도 생각난다. “(중국의 양명학자) 이탁오는 사제가 아니라 사우 정도가 좋다고 합니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칼럼읽다 2024.02.19

인생, 멀리 보기와 가까이 보기

인생, 멀리 보기와 가까이 보기 수정 2024-02-18 18:56등록 2024-02-18 14:51 이동재, ‘이콘-부처’, 2004, 캔버스 위에 금박과 금박 입힌 쌀알, 91×72.7㎝. 이동재/페이토갤러리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인생은 부분은 보여도, 전체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산에 올라가고 있으면서도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건 오직 발 앞에 놓인 돌계단뿐이다. 하지만 반복적인 시간이 모여서, 발 디딘 자리에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전체 인생이라는 커다란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의 빛나는 인생도 행운권 당첨처럼 한 방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한톨 한톨 축적된 것 아니겠는가. 이동재..

칼럼읽다 2024.02.19

이제 휴힉을 취하려 하네

이제 휴식을 취하려 하네 주상태 숨가쁘게 달려오다가도 멈추지 못한 이유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것만이 아님을 안다 그저 태양이 뜨지 않아도 시간 속에서 제어되고 좁은 공간을 벗어날 줄 모른다 화려한 조명을 받다가 무대 뒤로 돌아간 시간 나를 잊은 채 일 속에서 허덕이다 잠자리로 돌아간 시간에도 나는 숨소리만 낼 뿐 가쁜 숨소리만 날 뿐 아픈 가슴을 위하여 손 내밀지 못한다 제자리를 맴도는 치매 걸린 사람처럼 머리를 위하여 가슴은 한마디 하지 못한다 초조해진 마음으로 밤을 지새던 어느 새벽에 망가진 외장하드를 복구하는 것처럼 삶을 복구하기란 들숨과 날숨의 쉼 없는 고통 속의 소통 더 지치기 위하여 더 아프기 위하여 산소가 부족한 붕어처럼 입만 벌리고 있다 이제 쉬어야 할 듯 이제 살아야 할 듯

시를쓰다 2024.02.19

죽음을 선택해 주는 국가

죽음을 선택해 주는 국가 입력 : 2024.02.15 20:18 수정 : 2024.02.15. 20:24 김봉석 문화평론가 언젠가 나는 아사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이가 많이 들고, 주어진 인생을 충분히 성실하게 살아냈다고 확신할 때, 천천히 곡기를 끊으며 스스로 죽어갈 것이라고. 태어나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죽음은 나의 의지로 선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홀로 살아가고, 홀로 죽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의 치기였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거나, 치매 등으로 나의 의식과 기억이 허물어져간다는 것을 알았다면. 누군가의 도움으로 여생을 살아가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나의 의식과 육체를 온전히 움직이고 책임질 수 없다면 기꺼이 죽음을 맞..

칼럼읽다 2024.02.18

"선생님, 이건 글로 쓰기 너무 시시하지요?"

"선생님, 이건 글로 쓰기 너무 시시하지요?"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시니어 글쓰기 수업에서 넘어야 할 산 24.02.14 13:34l최종 업데이트 24.02.14 17:29l 최은영(christey) 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 [기자말] 나는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제목으로 어르신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첫 시간에 수업 이름을 들으신 어르신들은 대부분 피식 웃으신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법한 '말'을 '글'로 박제한 것에 대한 낯섦이 주는 웃음일 것이다. 강사 입장에서는 수업 시작을 수강생의 미소로 열 수 있으니 이보다 고마운 제목이 없다. [관련기사 :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이 흔한 말이 현실이 됐을 때 ..

책이야기 2024.02.18

‘의지’가 지쳤을 땐 ‘우연’이 필요해

‘의지’가 지쳤을 땐 ‘우연’이 필요해 수정 2024-02-14 18:54등록 2024-02-14 15:54 [크리틱] 김영준ㅣ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나는 늘 계단으로 가는 쪽이었다. 계단을 ‘뛰는 구간’으로 여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행과 잠시 작별하고 따로 갈 정도였다.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이 습관을 놔버리기는 아까워서 몇번 다시 시도했으나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지난해 시험한 새로운 방법은 꽤 성공적이었다. 방법은 가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다. 단, 엘리베이터가 내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만 탄다. 즉 올라갈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거나, 내려갈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중이면 탄다. 그 외에는 계단으로 간다. 복도에 나가면 엘리베이터 숫자가 말하는 것 같다. “타셔.” 또..

칼럼읽다 2024.02.18

예술영화를 위하여

예술영화를 위하여 주상태 삶이 한쪽으로 쏠릴 때 영화를 본다 삶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아닌 것처럼 나도 그들처럼 절망 속에서 나를 건져내고 혹은 뿌리치면서 영화는 끝이 나고 삶은 시작된다 ‘시작은 키스’ 98% 부족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실수 때문이었다 가보지도 못한 길을 가슴 졸이다가 걸어가는 마음으로 키스가 시작되고 삶은 벼랑 끝에 피어난 작은 꽃처럼 버림받기 싫어 엄마 손 놓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떨다가 겁먹은 사랑은 달아나다가 그녀가 보이고 삶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거센 비는 쏟아지고 따뜻한 방안에 작은 등불을 켠다 영화로 삶을 그리워하고 삶은 영화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여름날 소나기처럼 나를 찾아온다면 사랑을 위하여 영화를 볼 것이다 사랑도 영화처럼 삶도 영화처럼 2012. 8. 1

시를쓰다 2024.02.18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해서 입력 : 2024.02.14 20:30 수정 : 2024.02.14. 20:31 성현아 문학평론가 동료 작가의 첫 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그에게 책이 참 좋았다고 거듭 말했다. 고마워하던 그는 “진짜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게 더 도움이 돼요. 책 어땠어요?” 라고 다시 물었다.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약간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얻고자 하나보다 싶어, 비판할 요소들을 궁리하다가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말해주었다. ‘서문의 첫 구절은 구조가 복잡해 쉬이 읽히진 않았다’, ‘결말부에 반복되는 단어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웃어넘기고, 자리를 즐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쩐..

책이야기 2024.02.17

양념반 후라이드반

양념반 후라이드반 주상태 일요일이 되면 우리 집에는 잔치가 벌어진다 주 5일제 이후 한자리에 모인 가들은 제각기 꿈꾸던 주말을 보내고 맥주, 와인 그리고 콜라 배부른 자만이 먹을 수 있는 치킨을 먹는다 여가수가 부르는 치킨도 좋고 우리 동네 치킨도 상관없다 그냥 양념반 후라이드반 이유가 많다는 것과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넘어선다 한 명의 가족이라도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있다면 해질녘의 저녁 파티는 풍성해진다 양념을 먼저 먹고 후라이드를 나중에 먹는 것이 아니라 양념과 후라이드를 각각 먹고 각각 나누어주기도 한다 양념은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대신하고 후라이드는 날 것으로 얼굴을 마주할 것을 주문하고 맥주는 이제는 잊어버릴 것을 와인은 축배로 콜라는 후일담으로 생성된다 삶은 맥주 한 잔으로 충분히..

시를쓰다 2024.02.17

‘~라면’…해탈을 가로막는 그 상상들 [말글살이]

‘~라면’…해탈을 가로막는 그 상상들 [말글살이] 수정 2024-02-15 18:41 등록 2024-02-15 14:30 게티이미지뱅크 망할 놈의 상상.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빠듯한 현실에 허덕거리며 사는 사람도 틈만 나면 상상을 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고 하던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상상은 해탈을 가로막는 마귀. 그 마귀가 낳은 아들은 번민.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얌전히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도 함께 떠올린다.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일들까지 모두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가 가정문(조건문)이다. 대표적으로 ‘만약 ~라면’. ..

연재칼럼 202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