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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놓치지 않기로

나를 놓치지 않기로 입력 : 2024.03.13 22:07 수정 : 2024.03.13. 22:10 서진영 저자 모처럼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정월대보름을 보냈다. 한 친구의 생일에 맞춰 약속을 잡는데 마침 음력 정월 보름날이다. 한집에 모여 오곡밥 짓고 묵나물 볶아 한 해 기복까지 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절기를 제법 챙겨왔다. 시작은 2012년 무렵이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갖게 마련인 서울살이를 향한 막연한 바람이 내게도 있었는데, 서울살이 6년째로 접어들던 때 콩깍지가 벗겨졌다. 다람쥐 쳇바퀴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였고, 서울살이가 본래 팍팍한 법이라고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유행하는 옷차림 정도로 가늠하고 있는 내 일상이 참 서글펐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사는 게 시..

칼럼읽다 2024.03.14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주상태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출렁이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뱃살을 느끼며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버티는 삶이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은 차가운 아침 공기 속 흐릿하게 비치는 꿈이라는 것을 샤워를 하다 보니 알겠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내 몸이 아니라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어 도시를 떠돌던 욕망이라는 것을 이끼 낀 욕된 껍데기라는 것을 한강을 달리고 한강이 흐르고 가쁜 호흡 가다듬으며 앞서 달리는 자전거 속에서 미처 붙잡지 못한 연인들을 본다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한강을 달리지 못한 것은 한강이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것을 한강이 아름다운 것은 내가 너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를쓰다 2024.03.14

꽃샘추위보다 먼저 오는 ‘잎샘추위’

꽃샘추위보다 먼저 오는 ‘잎샘추위’ 입력 : 2024.03.10 19:58 수정 : 2024.03.10. 19:59 엄민용 기자 봄을 상징하는 절기인 우수(雨水)와 경칩(驚蟄)이 지났지만, 바람이 차갑다. 해마다 이맘때면 때아닌 한파가 불어닥쳐 사람들의 코끝을 시큰거리게 한다. 우리나라에 봄이 온다는 것은 한반도 북쪽의 찬 공기가 물러가고 남쪽의 따뜻한 공기가 올라온다는 의미다. 이때 두 공기층이 단번에 바뀌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 밀고 당기는 듯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 때문에 날씨가 따뜻해졌다가 다시 추워지기를 반복한다. 한반도의 오래된 기후 특색이다. 우리 옛말에도 이를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다. “2월 바람에 김칫독이 깨진다”는 속담도 그중 하나다. 시기적으로는 음력 1월부터 봄이 시작되지만 2월 ..

칼럼읽다 2024.03.13

함부로 뒤를 닦지 말지어다 [이유진의 바디올로지]

함부로 뒤를 닦지 말지어다 [이유진의 바디올로지] 19 _항문과 배변 수정 2024-03-12 18:53등록 2024-03-12 15:31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프레스코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애널로그’의 작가 이자벨 시몽은 이 그림에 눈길을 준다. 하나의 구멍에서 태어나고 먹고 사랑하고 유희하고 배설하고 죽고 묻히고 되살아나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엿볼 수 있다는 얘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항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배아가 세포분열을 시작해서 가장 먼저 생기는 구멍인 ‘원구’가 항문이 된다. 그래선가. 인류가 지어낸 똥 이야기, 방귀 이야기 상당수가 새로운 생명과 탄생을 의미한다. 제주 탄생 설화에 나오는 설문대할망은 똥을 누어 360개의 오름을 만들었다. 16세기 프랑스..

칼럼읽다 2024.03.13

학년 수련회이야기

학년 수련회이야기 주상태 버리고 와야 할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한 기억을 지우는 일은 삶을 추억하는 낭만에 젖어 드는 일이다 가끔 찾아오는 바닷가에서 마냥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바닷가였기 때문이고 푸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파문을 일으켜도 파도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었기보다 나를 선택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산이 보이고 산을 건너 하늘이 보이고 하늘 위에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물속에서 강아지가 뛰노는 풍경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해변의 아침 안개가 흩뿌려진 바닷가의 외침 나를 지우고 너를 지우고 생각을 지우는 일을 기억한다 해변의 시간을 위하여 파도에 묻혀버린 안개에 숨어버린 아이들의 외침을 다시 듣는다

시를쓰다 2024.03.13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숏폼’이 끝나고 난 뒤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숏폼’이 끝나고 난 뒤 수정 2024-03-11 14:14 등록 2024-03-11 07:00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요거 해야 한다, 이런 거 좀 가르쳐줘요.” “일단 눈 뜨면 숏폼부터 시작하지 않나…….” 이효리와 샤이니 키가 묻고 답한 대화다. 설현은 “쇼츠는 제 육체예요”라며 어딜 가든 뭘 하든 ‘쇼트폼’(숏폼)과 함께였다. 숏폼을 볼 수 있어 지하철을 애용한다면서, 연예인인데 시선이 불편하지 않냐는 우려에는 “신기하게 다들 쇼츠 보고 있던데요”라고 대답했다. 나도 이 장면들을 숏폼으로 봤다. 번화가엔 탕후루나 마라탕이, 방에는 술이나 게임이나 향정신성의약품류가 있다. 그리고 우리 손에는 숏폼이 있다. ..

칼럼읽다 2024.03.12

돌고래 기사단을 생각하며

돌고래 기사단을 생각하며 입력 : 2024.03.11 20:18 수정 : 2024.03.11. 20:22 심완선 SF평론가 돌고래는 복잡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적 생명체이며 돌고래와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한때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1961년 미국 그린뱅크의 국립전파천문대에 모였던 10명의 과학자도 그중 일부였다. 프랭크 드레이크, 칼 세이건 등을 포함한 이 모임은 외계 지적 생명체를 탐색하는 SETI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참석했던 존 C 릴리는 다른 종과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며 특히 돌고래에 빠져 있었다. 참석자들은 돌고래 이야기에 매혹되는 한편, 돌고래의 언어를 해석하는 일이 외계 신호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전혀 다른 두 지성체 간의 소통을 시도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들은 ..

칼럼읽다 2024.03.12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주상태 하필이면 터미널이다 고속으로 간다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광주로 갈 수도 있고 부산으로 강릉으로 갈 수도 있는데 서울에 살기에 지하철 교대역에 내려야 2호선을 탈 수 있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려야 7호선을 탈 수 있고 9호선도 탈 수 있다 9호선을 타고 가는 길은 우리집에서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동작역에 내려야 4호선을 탈 수 있는데 가끔이다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2호선을 기다리고 교대역에 내려 3호선을 기다린다 고속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무의식을 만나 삶을 내팽겨 친다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이수역에 가고 이수역에선 4호선으로 갈 수 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마음먹고 한 정거장만 더..

시를쓰다 2024.03.12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수정 2024-03-07 18:45 등록 2024-03-07 14:30 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영화 ‘파묘’에 나온 ‘그냥 부자’란 말이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냥’은 철학적 무게가 느껴지는 부사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뭉뚱그려 말해 ‘그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있지 뭐.” “이거 저쪽으로 옮길까?” “아니, 그냥 그 자리에 둬.” 변함없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라는 뜻이 있다. “어쩐 일로 연락을 했어?” “그냥.” “왜 날 좋아해?” “그냥 좋아.” “그 일을 왜 하는가?” “그냥 한다오.” 복잡한 계산 없이 ..

연재칼럼 2024.03.11

청소년 쉼터를 위한 서시

청소년 쉼터를 위한 서시 주상태 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다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일이다 무작정 나왔던 무심코 뿌리치고 나왔던 아이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 오래 머물 수 없는 자리 하늘이 맑은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가슴에 그리움을 묻고 사는 시간이다 이유없이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생각없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하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들과 헤어지길 두려워하고 함께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은 쉼터가 있기에 꿈꿀 수 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졸음을 이겨내게 해주고 할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책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눈물이 필요했고 담배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다 요리 잘하는 내 ..

시를쓰다 2024.03.11